제374회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2023년 1월 1 설교 - 로마서 강해 116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4절~8절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4節~8節
“4. 一つのからだには多くの器官があり、しかも、すべての器官が同じ働きをしてはいないように、
5. 大勢いる私たちも、キリストにあって一つのからだであり、一人ひとりは互いに器官なのです。
6. 私たちは、与えられた恵みにしたがって、異なる賜物を持っているので、それが預言であれば、その信仰に応じて預言し、
7. 奉仕であれば奉仕し、教える人であれば教え、
8. 勧めをする人であれば勧め、分け与える人は惜しまずに分け与え、指導する人は熱心に指導し、慈善を行う人は喜んでそれを行い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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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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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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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6번째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私たちにくださる賜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합니다만 그 기능은 다 다르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언과 섬김과 가르침과 위로와 구제와 다스림과 긍휼……이렇게 일곱 개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預言、奉仕、教えること、勧めること、分け与えること、指導すること、慈善を行うこと

우선 예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만, 무슨 기도를 하는 가운데 주님이나 천사가 나타나서 무슨 말을 해주는 것이 예언의 은사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착각을 누가 하느냐. 믿음이 적은 분들이 하느냐 하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꽤나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응답을 받았다, 계시를 받았다 하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런 것은 성경을 어설프게 읽고는 구약 시대 때의 선지자 흉내를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극히 한정된 선지자만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만나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신 후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시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구세주의 탄생에 있어서 예언하기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으로 성취가 되지요. 그런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기록합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それは、訳すと「神が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이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혹 교회에 보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좀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무슨 구약에서 예언된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11장 13절~14절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あなたがたに受け入れる思いがあるなら、この人こそ来たるべきエリヤなのです。

여기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이는 성경, 구체적으로는 구약성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구약에서 예언된 사람은 세례 요한까지입니다.

그 이후로는 제아무리 베드로나 요한, 그리고 바울과 같은 대표적인 사도라 하더라도 예언된 바가 없어요.

그렇다고 그 사도들이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 우리 모두가 주님을 찾으면 찾게 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예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꿈속에서 보인 예수님입니까. 금식하는 데에 들려온 음성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나 목사의 말이라 하더라도 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냥 자기 생각, 자기 주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약에 보시면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내용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5절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それから六日目に、イエスはペテロと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た。
すると、弟子たちの目の前でその御姿が変わった。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衣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
そして、見よ、モーセとエリヤが彼らの前に現れて、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そこでペテロ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私たちがここにいることはすばらしいことです。よろしければ、私がここに幕屋を三つ造ります。あなたのために一つ、モーセのために一つ、エリヤのために一つ。」
彼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見よ、光り輝く雲が彼らをおおった。すると見よ、雲の中から「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彼の言うことを聞け」という声がした。


예수님께서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어떤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제자들이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모습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이 장소가 무슨 산이었는지,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예, 성경 어디에도 그 장소가 무슨 산이었는지, 아니면 그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 기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 기록이 없겠어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 내용 자체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소가 어디다, 무슨 말들이 오갔다고 하는 말들을 하면서, 마치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을 자기만 아는 것처럼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고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라고 한다면 그에게 상징되는 의미는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고,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모세는 곧 율법이었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그는 구약에서 선지자로 대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에 보면 세례 요한을 예언하는 구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라기 4장 5절~6절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見よ。わたしは、主の大いなる恐るべき日が来る前に、預言者エリヤをあなたがたに遣わす。
彼は、父の心を子に向けさせ、子の心をその父に向けさせる。それは、わたしが来て、この地を聖絶の物として打ち滅ぼす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수님 외에 누구였지요? 예,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율법과 선지자로 상징되는 인물입니다. 음?

율법과 선지자가 뭐라고 그랬죠? 그렇습니다.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중심에 누가 계세요. 그렇죠. 예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율법과 선지자 즉 성경은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그런 의문을 가져야지요. 그건 홍목사 당신의 해석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져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1절~22절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しかし今や、律法とは関わりなく、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によって証し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
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信じるすべての人に与えられる神の義です。そこに差別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율법과 선지자들 즉 성경에 의해 증거를 받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일부 몇몇 선지자들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의가 미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길게 말씀을 드린 이유는, 예언이라고 한다는 것은 무슨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을 깨닫는 것이요, 성경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9절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私たちが以前にも言ったように、今もう一度、私は言います。もしだれかが、あなたがたが受けた福音に反する福音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てい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주시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의에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언 외에도 섬기는 일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과 그리고 다스리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오해를 하면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중에서 어떤 은사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교회에 보면 이른바 은사 찾기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그런 주장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은사는 하나가 아닙니다.
둘째, 은사는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은사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경제학자 말에 의하면 지금 전세계 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현재 경제를 제대로 분석한 경제학 이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경제학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극단적이라는 것이에요. 이를 쉽게 말하자면 예를 들어서 경제학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분류를 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그럼 여러분께서는 생산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소비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이게 말이 되나요?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어디 생산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세상에 어디 소비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생산하는 사람이 소비도 하고, 또한 소비도 하는 사람이 생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나누어서 마치 서로 다른 사람들처럼 설명하려고 하니까 이게 실제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기기만 하는 사람?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 물론 교회도 규모가 어느 정도 되면 각 부서가 있지요. 회사도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 부서에 따라서 섬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그리고 위로하거나 구제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섬기기도 하다가 가르침을 받기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구제를 하다가도 위로를 받거나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나는 섬기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섬기기만 할 거야, 나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가르치기만 할 거야. 더 나아가서 나는 다스리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다스리는 일 아니면 안 할 거야……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조직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둘째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달라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 그래도 기도를 하면 다 주신다고 했는데 은사도 구하면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물론 성경에 보시면 은사를 구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은사를 구하라고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愛を追い求めなさい。また、御霊の賜物、特に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

성경은 우리에게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기록을 합니다. 여러분, 예언이 뭐라고요? 예, 이는 기도하면서 무슨 음성을 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다……가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한국에 보면 유독 무슨 방언의 은사를 달라 또는 신유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방언의 은사를 구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이 많기를 바라지만, 그 중에는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 않나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だれかが異言で語るのであれば、二人か、多くても三人で順番に行い、一人が解き明かしをしなさい。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있으면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하고 그 때마다 한 사람이 통역을 하라고 되어 있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고린도전서 14장 23절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ですから、教会全体が一緒に集まって、皆が異言で語るなら、初心の人か信じていない人が入って来たとき、あなたがた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ることにならないでしょうか。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한국 교회에서 보면,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도 없고 자기도 해석하지 못하면서도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신유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제가 직접 들은 말씀입니다만, 자기 아내가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갔었는데 수술을 하라고 하더래요.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수술을 하려고 했더니만 교회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더라는 거예요.

그 소문이 뭔지 아십니까. 아니, 목사님 정도 되면 기도로 병을 고쳐야지 왜 병원에서 수술을 받느냐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무슨 신유의 은사가 없다는 둥 기도가 부족하다는 둥, 나아가서 믿음이 적다는 둥 그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힘들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병원에 가면 안 된다고 한다면,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아니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악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좋으면 환자를 보고도 기도를 열심히 해서 고치면 되지 왜 째고 꿰매고 약을 바르고 합니까. 그렇잖아요?

하지만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에요.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믿음이 좋은 의사나 간호사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을 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습니까. 그런 그 사람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의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마땅한 치료법이나 약 같은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때는 정말 기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지금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손을 들었어요. 치료할 수가 없대요. 약도 없대요. 그러면 어떡합니까. 오로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병원에 가면 치료법도 있어요. 약을 먹으면 낫는 병이에요.


그래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병원에 가지 않아요? 아니, 병원에 가는 것이 무슨 우상숭배를 하는 일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치료하는 의사나 간호사님들의 손길을 통해서도 주님이 역사해주셔서 치료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성경을 미련하게 해석을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하물며 목사님한테까지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 정말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구한다면서 무슨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고 그러면서 은사를 구합니까. 성경에 그렇게 해서 은사를 구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아가 무슨 다스리는 은사를 구한다면서, 이제 자기가 무슨 선거에 출마를 하려고 하는데 뭐라고 기도를 합니까.

이사야 6장 8절처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합니다.

「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자, 생각해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왕이나 선지자들 중에서 자기가 왕이나 선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응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모세나 엘리야가 기도 응답 받아서 선지자가 됐대요? 아니면 사울이나 다윗이 자기가 왕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원 가서 기도했다고 합니까.

대표적인 선지자인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한테 부름을 받아서 순종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7장에 의하면 그는 목자였고 뽕나무를 키우는 농부였습니다.

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모두가 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신 것이에요.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무슨 성수주일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다른 하나도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9절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맨날 아침이나 밤이나 평일이나 주말이나 교회에 나와서 기도만 한다고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런 시기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무슨 시험 준비를 한다거나 하면 몇 개월에서 몇 년 동안 공부만 해야 할 때도 있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공부가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평생을 그렇게 보내는 것은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도 중요하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6일 동안 우리의 모든 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도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감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2023년 첫 주일, 하루를 내디뎠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 감사하며, 주님께서 머리 되신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깨달으면서 때로는 섬기기도 하고 때로는 가르치기도 하고, 그리고 위로하거나 구제하거나 다스리거나 긍휼을 베풀어 가면서 주님의 지체로서 역할을 감당해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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