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2회 첫 번째 성탄
2022년 1225 설교 - 로마서 강해 114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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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
“2.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のみこころは何か、すなわち、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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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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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성탄절 예배를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4번째 “첫 번째 성탄” 初めての聖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
2. 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のみこころは何か、すなわち、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2장 2절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도 지난 주처럼 마지막 부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는 무엇이 선한 일인지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완전하다고 하시는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 앞에서는 두 가지의 갈림길이 나옵니다. 하나는 이 세대를 본받는 길이요, 또 하나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길입니다.

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る。

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く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어떻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신지를 금방금방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잖아요. 사실 그것이 정답인데, 그대로만 하면 축복을 받는데, 그런데 그 정답이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에 보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정답을 쉽게 찾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해주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1번.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끝까지 지킨다.
2번.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고 뭐고 우선 살기 위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

이 정도의 질문이라면 사실 주일학교 아이들이라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다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자 가나안 땅을 마치 헌신짝 내버리듯이 쉽게 포기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는 대단히 곤혹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못 믿어서 결국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시켜서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스라멜이지요.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미처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생각으로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에게 줄 축복을 가로채서 자신이 받아내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야곱이 넘치는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야곱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까.

창세기 25장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すると主は彼女に言わ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형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비록 간발의 차이로 동생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을 세우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못 미더웠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이 일로 인해서 축복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집에서 나와 도망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그야말로 험난한 인생을 보내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답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의 삶도 좀 살기 편할 텐데 이를 잘못 짚는 바람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냐 하면, 오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이 척박한 복음의 땅 일본에도 가는 여기저기서 캐롤이 흘러 나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도, 목욕탕에 가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도 크리스마스를 노래하고, 시내 곳곳에는 이 시골 군마현에도 크고 작은 불빛 장식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에 기독교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흔히들 말하는 것이 일본 전체 인구의 1프로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기독교인 1프로라고 하는 숫자에는 가톨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닌 완전히 다른 종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다 똑 같은 그리스도교로 보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그 숫자에는 가톨릭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몰몬교, 통일교 같은 곳도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성경에 입각한 복음주의 개혁주의 기독교 숫자만을 본다고 한다면 훨씬 더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타클로스다 크리스마스 케익이다 하면서 장사를 하고 그러는 것을 보면 참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물론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교회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인이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시간도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안 계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널리 알리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지금 이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본받아야 할 텐데 어떻게 된 것이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 보더라도 왜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세상 이야기,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교회에 갇혀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 보더라도 인권이 유린되고 억압받고 있을 때에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습니까.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없어진 지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에서, 인권운동에 앞장 섰던 분이 킹 목사님 아니셨습니까.

당시의 그와 같은 활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하고도 용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킹 목사님은 1968년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활동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마침내 오바마 대통령도 탄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과거에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암울한 시기에도 기독교인들이 그 아픔들을 위로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도 많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너도나도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다가, 이제 세상 좋아지니까 너도나도 말을 하기 시작하나 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옛날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인권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다면, 요즘 보면 동영상 광고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아니면 자기가 좀 잘하면 감투라도 쓰기 위해서 그런 과격한 말들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그래도 성경 좀 읽었다고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人はみな、上に立つ権威に従うべきです。神によらない権威はなく、存在している権威はすべて、神によって立てられ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을 인용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다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라면서 복종해야 한다고 하다가, 이제 자기가 안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마귀다 사탄이다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까지도 서슴지 않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실 요즘 특히 한국 교회에 보면, 안타깝게도 귀가 얇은 분들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우리 목사님이 저렇게 말했으니까……그러면서 그 말에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귀가 얇아 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은 안 읽었지만, 교회 다닌 게 몇 년인데……라고 한다면, 정말 교회만 다니면 성경을 올바로 알게 되나요?

생각해보세요.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몇 년 동안 학교를 다닙니까. 초등학교 6년에 중고등학교 3년씩 6년, 다 합치면 12년이나 학교를 다녀요. 그렇다면 12년이나 학교만 다녔다면 모두가 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자기가 원하는 회사에 취직이 되나요?

아니에요.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해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어떤 분은 이를 지도 몰라요. 아, 내가 교회에 이런 프로그램도 수료했고 무슨 성경학교도 수료했다……이건 마치 나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있고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도 있고 개근상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그런 종이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내 머리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13장을 공부할 때 다시 배우겠습니다만, 바울이 이 세상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도 이제 믿는 사람들이 곧 말세가 온다, 종말이 온다 그러니까 이 세상 제도를 따르려 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이는 믿음이 올바로 서는 것이 아니라 혼란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이제 곧 오신다고 해서, 학교를 안 가도 되겠어요? 일을 안 해도 되요?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아도 돼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이와 같이 세상 규범들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무조건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복종하기만 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는 저도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만, 당시 대선 기간이었나 그랬는데, 제가 다니던 교회에 어떤 목사님이 초청이 되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뭐, 이름을 말씀 드리면 아실 만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때 말씀이 보니까 이건 교회 강단에서 성경 말씀을 전하는지 아니면 특정 후보 지지 유세를 나왔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것이 다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다 이 세대를 본받는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 때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조용기 목사님이 예전에 그런 간증을 하신 적이 있으셨대요. 그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자기가 설교를 하는데 맨날 예수님 얘기나 성경 얘기만 하니까 자기가 좀 부족해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는 책방에 가서 철학책을 몇 권 사가지고는 그것을 읽고서, 설교 시간 때에도 그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면서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배가 끝난 다음에 어떤 남자분이 찾아오더래요.. 그러면서 그 분이 목사님한테 그랬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무슨 무슨 대학교 철학과 교수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 말씀하시는 철학에 대한 부분은 대학교 1학년생 정도도 아는 내용이에요. 저는 목사님한테 철학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른대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오로지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떠나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누구는 그럴 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이 21세기인데 성경은 신약성경이라고 해봤자 2000년 전에 적힌 책 아니야.

그렇다면 믿음도 요즘 식으로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주장도 있을 수가 있겠지요.


사무엘하 6장에 보시면 다윗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 왕 때 블레셋 사람들한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였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을 맡은 웃사라고 하는 실무 담당자가 이 과정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6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すると、主の怒りがウザ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神はその過ちのために、彼をその場で打たれた。彼はそこで、神の箱の傍らで死んだ。

그러면 이 웃사라는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사무엘하 6장 좀 앞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 3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彼らは、神の箱を新しい荷車に載せて、それを丘の上にあるアビナダブの家から移した。アビナダブの子、ウザとアフヨがその新しい荷車を御した。
이들은 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이게 별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부분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부분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원인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민수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宿営が移動する際には、アロンとその子らが聖所と聖所のすべての用具をおおい終わってから、その後でケハテ族が入って行って、これらを運ばなければならない。彼らが聖なるものに触れて死ぬ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これらは、会見の天幕でケハテ族が運ぶ物である。

당시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성인 남성은 전쟁이 시작하면 모두 싸워야 했습니다만, 여기서 예외였던 사람들이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는 대신 하나님의 성전과 거기서 사용하는 기물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똑 같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그 자손에 따라서 맡은 역할이 달렸는데, 특별히 레위의 둘째 아들인 고핫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운반하는 방법은 수레에 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깨에 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여기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민수기 7장 6절~9절을 봅니다.

민수기 7장 6절~9절
“6.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7.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
8.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고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에게 감독하게 하였으나
9.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そこでモーセは台車と雄牛を受け取り、それをレビ人に与えた。
ゲルション族には、その奉仕に応じて台車二台と雄牛四頭を与え、
メラリ族には、祭司アロンの子イタマルの監督のもとにある彼らの奉仕に応じて、台車四台と雄牛八頭を与えた。
しかしケハテ族には何も与えなかった。彼らの聖なるものに関わる奉仕は、肩に担いで運ぶことだったからである。


여기에 보시면 모세가 레위 지파에게 소를 나누어 주었대요 그런데 다른 자손들한테는 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유독 고핫 자손에게는 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소가 아까워서가 아니에요.

그들이 맡은 일들이 법궤를 운반하는 일인데, 이는 소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매는 것이었기에 소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굳이 소를 주지 않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웃사는 법궤를 어깨에 매지 않고 수레로 끌었을까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고핫 자손이 운반하라고 하신 기록이 있는 민수기는 대략 기원전 1450년에 적힌 것이고, 그리고 웃사가 법궤를 수레로 끌었던 시기는 기원전 1000년 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기원전 1450년이나 기원전 1000년이나 다 까마득한 옛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벌써 450년이라는 기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450년이라고 한다면 지금이 2022년이니까 450년 전이라고 하면 언제예요? 1572년입니다. 이 때는 조선 14대 왕인 선조 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450년 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옛날입니까.

그러니 21세기에 와서 법궤를 운반해야 하는데,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규정을 따르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휴, 지금이 어느 시댄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웃사가 자기 멋대로 그 시대에 맞게 해석을 해서 일을 저질러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그를 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天地は消え去ります。しかし、わたしのことばは決して消え去ることがありません。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여러분, 성경 말씀은 오래 되었다고 고전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아무리 오래 전에 기록된 말씀이라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올바로 깨닫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대를 본 받는 것이 아닌,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어제 밤에 갑자기 프린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오늘은 주보를 뽑지 못했습니다.

뭐, 이 프린터에 문제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지금까지도 이런 저런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프로그램을 깔거나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살리기도 하고, 그리고 한 번은 분해를 해서 그 안을 청소도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가끔 에러가 나면 껐다가 다시 켜고 그러면서 그럭저럭 사용해왔었습니다만, 어제 밤에 성경 필사 원고지를 뽑고 있는데 갑자기 전원이 퍽 하고 나가더라고요.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전원을 켜봤지만 불이 깜빡깜빡 거리다가 다시 꺼지고 맙니다.

뭐, 비싼 프린터도 아니고, 그리고 워낙 오래 되기도 한 프린터이기 때문에 수명이 다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프린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도 이 프린터와 같은 삶을 보낼 수 있다면 괜찮은 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치 이 프린터처럼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랑할 만한 건 없지만, 끝까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 조용히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값진 인생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세상에 물들어 세상을 찍어낼 수도 있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담아서 하나님을 찍어낼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세상이 있습니까. 주님이 계십니까.

예전에 2013년 5월 26일자 아사히신문 천성인어 칼럼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고령인 사람에는 세가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여전히 젊은 사람, 옛날에는 젊었던 사람, 그리고 단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는 사람.

高齢の人には三つのタイプがあるとも言われる。まだ若い人、昔は若かった人、そして一度も若かったことのない人。


이 말씀이 성탄절인 오늘은 더욱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이유는 2천년 전에 주님께서 분명 우리에게 오시고,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여전히 주님이 계신 사람, 옛날에는 마음 속에 주님이 계셨던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마음 속에 주님이 계신 적이 없는 사람이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이 계십니까.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오시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십니까.


만에 하나, 지금까지 우리 마음 안에 진정한 주님이 안 계셨다면, 이제부터라도 바로 오늘을 우리 삶에 있어서 첫 성탄절로 삼으셔서 주님을 모셔드리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 세대를 본받는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오직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오로지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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