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3회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
2022년 10월 23 설교 - 로마서 강해 105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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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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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5번째 시간으로서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 素晴らしい神様の接ぎ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접붙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이 말씀을 좀 쉽게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그들도 믿는 데에 머무르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あの人たちも、もし信仰の中に居続ける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는 참 감람나무 가지가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그들이 축복을 받았을 텐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감람나무 가지가 꺾이고, 그들이 받아야 할 복음이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어떻게 말씀드렸었지요? 참 감람나무 가지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꺾이심으로 말미암아, 돌감람나무 가지 즉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서 그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난 주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공부해오면서, 그저 그런가 보다……하고 막연하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접붙임과 하나님의 접붙임. 같을까요. 다를까요.

예, 분명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사람의 힘으로 접붙임을 하는 것과 하나님의 힘으로 접붙임을 하는 것.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시러큐스(シラキュース) 대학에는 한 놀라운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분명 한 그루의 나무인데 이 대학 미대 교수님이 하나하나 접붙임을 함으로 인해서, 이 한 나무에서 40종류의 과일이 맺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A라고 하는 나무에 B라고 하는 나뭇가지를 접붙임 했어요. 그렇다면 B라고 하는 나뭇가지는 시간이 지나면 A라고 하는 나뭇가지가 된다? 아니면 계속 B라고 하는 나뭇가지이다?

만약에 접붙임을 한 결과 본래 나뭇가지의 성질이 변해서 그 접붙임 한 나무와 동일하게 된다면, 아무리 접붙임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40종류의 과일이 열리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처음에는 조금 다른 과일이 열리다가, 접붙임 한 나무와 같아진다면 40번이 아니라 400번을 접붙임 해봐야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한 가지 열매 밖에는 안 열릴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대학에 있는 나무는 어떤가 하면, 본래 그 나뭇가지가 가지고 있던 성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접붙임을 한 나무와는 다른 열매를 계속해서 맺는다는 것이에요.


자, 그럼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참감람나무가 있어요. 제가 어딘가에서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를 꺾어 왔습니다. 그래서 참감람나무의 나뭇가지도 꺾어서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 했습니다. 그렇다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는 참감람나무의 열매가 일릴까요. 아니면 돌감람나무 열매가 일릴까요.

그렇죠. 앞서 그 미국 대학에 있는 그 나무에 40종류의 과일이 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어떤 나무에 다른 나뭇가지를 접붙임 해도 그 나뭇가지의 본래 성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양한 과일이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가져와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사과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복숭아 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는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안 난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간증해주세요.


자, 우리는 그러면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라고 하는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 참감람나무 열매 맺기를 기대하실까요 아니면 돌감람나무 열매 맺기를 기대하실까요.

잠시 이사야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5장 1절~2절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さあ、わたしは歌おう。わが愛する者のために。そのぶどう畑についての、わが愛の歌を。わが愛する者は、よく肥えた山腹にぶどう畑を持っていた。
彼はそこを掘り起こして、石を除き、そこに良いぶどうを植え、その中にやぐらを立て、その中にぶどうの踏み場まで掘り、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ところが、酸いぶどうができてしまった。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기름진 땅에 최고의 환경을 갖추어 놓으시고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고 난 후에도 열심히 가꾸셨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와 같이 노력을 했다면 어떤 열매가 맺었겠습니까. 최고의 토양에 최고의 포도를 심고 최고의 기술로 가꾸었다면 당연히 최고의 포도가 맺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포도 맺기를 바라셨대요? 그렇습니다. 좋은 포도, 최고의 포도 맺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부으시고 정성껏 가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들포도가 맺혔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분명 최고의 포도를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들포도가 날 수가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바라셨대요? 그렇습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를 뒤집어서 오늘 말씀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리 좋은 참감람나무라 하더라도 그 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에서는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안 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생각해보세요. 그깟 돌감람나무 열매를 얻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이셨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단순히 나무를 꺾어다가 접붙이실 뿐만이 아니라,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와도 같은 우리라 하더라도, 믿음에 머묾으로 인해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으면, 하나님의 접붙임의 능력,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참감람나무열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에 있습니다.

이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 보시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ひと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기록합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은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본래 어부였습니다. 그는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기 보다는 배를 탔을 것이며, 고기잡이에 대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베드로의 나이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참고가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15절
“14.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それからイエスはペテロの家に入り、彼の姑が熱を出して寝込んでいるのをご覧になった。
イエスは彼女の手に触れられた。すると熱がひき、彼女は起きてイエスをもてなした。

여기 보시면 베드로에게는 그의 장모님이 계셨습니다. 장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베드로는 당시 결혼을 했었다는 말이 되지요?

베드로가 결혼을 했었다는 기록은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5절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私たちには、ほかの使徒たち、主の兄弟たちや、ケファのように、信者である妻を連れて歩く権利がないのですか。

여기서 <게바>라고 하는 이름은 요한복음 1장 42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사역을 할 때 아내와 함께 다녔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당시 가정을 가질 만한 충분한 나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충분한 나이와 함께, 그에 걸맞는 고기잡이로서의 지식과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과 베드로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혹시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는 함께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누가복음 5장 1절~2절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5:01 さて、群衆が神のことばを聞こうとしてイエスに押し迫って来たとき、イエスはゲネサレ湖の岸辺に立って、
5:02 岸辺に小舟が二艘あるのをご覧になった。漁師たちは舟から降りて網を洗っていた。

여기서 게네사렛 호숫가라고 하는 것은 갈릴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니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는 그물을 씻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기잡이를 하면 그 다음에 그물을 손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조금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왔다고 한다면 그물을 손질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잡아온 고기를 실어 날라야지요. 고기를 내버려두고 그물을 손질할 수가 있나요. 하지만 그들은 배에서 내린 다음 그저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는 날라야 할 물고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3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5:03 イエスはそのうちの一つ、シモンの舟に乗り、陸から少し漕ぎ出すようにお頼みになった。そして腰を下ろし、舟から群衆を教え始められた。

예수님께서는 거기 빈 배 중에서 하나를 골라 거기 앉으시고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아마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들도 일을 하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의외의 행동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04 話が終わるとシモンに言われた。「深みに漕ぎ出し、網を下ろして魚を捕り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앉아 계셨던 배의 주인인 시몬 베드로에게로 다가가십니다.

여러분, 보통 처음 만난 사람과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급하더라도 일단 안녕하시냐는 인사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많이 바쁘시죠, 고기는 많이 잡혔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 다 생략. 베드로에게 다가가서는 뭐라고 하셨다고요? 예, 다짜고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부자연스럽지 않은 범위 내에서, 한 번 베드로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5절에서 보시면 알다시피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어요.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갈릴리 바닷가는 물이 맑기 때문에 환할 때 그물을 던지면 고기들이 다 도망가 버린대요. 그래서 밤에 고기잡이를 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날따라 고기잡이를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어요. 말하자면 완전히 장사를 망쳤습니다.

거기다가 밤까지 샜으니 얼마나 피곤 하겠어요. 밤새도록 일을 해서 몸은 피곤한데 고기도 안 잡혔으니 대단히 심기가 불편했겠지요. 본래 뱃사람이라고 한다면 좀 거친 성격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투덜투덜 거리면서 그물 손질을 하고 있는데, 저기 보니까 낯선 남자 하나가 와서는 사람들한테 무슨 말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자세히는 안 들리지만 거기 모인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기에는 못마땅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저게 누구야? 사람 바빠 죽겠는데 아침부터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어쭈? 나한테 허락도 없이 내 배에 올라타네?

뭐 그러면서 대단히 불편한 심기로 예수님과 거기 모인 사람들을 보고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 사람이 말을 마치고 자기한테로 와요. 옳지. 잘 됐다. 내가 속상한데 쓴 소리 한 번 해줘야겠다. “아니, 이 보쇼. 주인한테 허락도 없이 남의 배에…….” 이렇게 말하려고 했더니만 그 사람이 먼저 말을 해요.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뱃사람은 뱃사람을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 여러 기계들도 있고 해서 옛날보다는 편해졌을 지는 모르지만, 옛날에는 그야말로 고기잡이에 있어서 모든 것을 힘으로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고기잡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는 어느 정도 몸집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타고난 뱃사람인 베드로가 자기한테 말을 하는 사람을 보니까, 전혀 고기잡이처럼 보이지가 않아요. 예수님은 그 때까지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 집에서 자랐을 테니까 목수 일을 하셨었겠지요. 그것도 편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고기잡이만큼 힘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전혀 고기잡이를 해본 적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렇잖아도 지금 일을 망쳐서 심기가 불편한데 꼭두새벽부터 다짜고짜 다시 고기잡이를 나가래?

열 받아요? 안 받아요? 사실 여기서는 열이 받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아니, 지가 뭔데……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베드로도 차마 심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분명 그 자리에는 방금 전까지 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무리들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한테 선생님이라고 해요.

여기서 베드로가 함부로 성질을 부렸다가는, 아니, 지금 선생님한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냐면서 혼날 지도 몰라요.

그에게는 이 순간 두 가지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자존심과 지식과 경험, 또 하나는 그 남자가 하는 말,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는 놀랍게도, 어쩌면 평소의 베드로 답지 않게 그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 보기로 결정을 합니다.


누가복음 5장 5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05 すると、シモンが答えた。「先生。私たちは夜通し働きましたが、何一つ捕れませんでした。でも、おことばですので、網を下ろしてみましょう。」

그 선생이라는 사람의 말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보쇼. 슨상님, 우리 같은 고기잡이 프로가 밤새도록 노력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소. 그런데 지금 보자 하니 고기잡이는커녕 그물 한 번 못 잡아 본 것 같으면서, 우리한테 가르치려 한단 말이제.

좋소. 여기 많은 사람들도 있고, 당신 체면도 있을 테니 그래, 한번만 따라 봅시다.

저에게는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해요. 제가 너무 오버한 것 같으십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좀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해야지만 말이 맞아요.

그 이유는 좀 뒤에 보시면 압니다.


자,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야고보와 요한 등과 함께 다시 배에 올라탑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에 대해서 의문이었습니다. 아니, 갈릴리 호수가 좀 넓어요? 얼마나 넓으면 분명히 호수인데 갈릴리 바다라고까지 하잖아요. 그런데 “깊은 데”가 어딘 줄 알고 거기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나 거기서 고기잡이를 하는 뱃사람이라면 그들 사이에서는 “깊은 곳”이라고 한다면 “아, 거기”라고 하는 곳이 있지 않았을까 해요.

만약에 베드로가 알지 못했다고 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깊은 곳이 어디냐”하고 물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기 뱃사람들은 “깊은 곳”이 어딘지는 다들 알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낯선 선생님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보자고 생각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자기들만 아는 그런 말을 예수님께서 사용했기 때문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뭐,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국에 가서 베드로한테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겠지요.


아무튼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또다시 손질하던 그물들을 다시 배에 싣고서 그 “깊은 곳”을 향해 나갑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그 다음에 할 말을 이미 준비해 두었을 지도 몰라요.

그는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냐 하면,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봤자 소용없다. 우리는 괜한 짓만 하다가 또다시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선생인지 뭔지 하는 사람한테 그 빈 그물을 내던지면서,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한 마디 해줘야겠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습니까.

누가복음 5장 6절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5:06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그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고기가 잡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상 그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이 1%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가득 차서 찢어지고 있는 그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누가복음 5장 7절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5:07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제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물고기가 많은지 배가 잠길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이제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려워집니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건방진 소리를 한 거야. 나는 이제 끝장이야. 천벌을 받을 지도 몰라.

돌아온 그는 예수님 앞에 나갑니다.


누가복음 5장 8절~11절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5:08 これを見たシモン・ペテロは、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言った。「主よ、私から離れてください。私は罪深い人間ですから。」
5:09 彼も、一緒にいた者たちもみな、自分たちが捕った魚のことで驚いたのであった。
5:10 シモンの仲間の、ゼベダイの子ヤコブやヨハネも同じであった。イエスはシモンに言われた。「恐れることはない。今から後、あなたは人間を捕るようになるのです。」
5:11 彼らは舟を陸に着けると、すべてを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그는 예수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 친구들을 축복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록 그가 믿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보다 말씀을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기잡이를 마치고 배를 육지에 댔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이 뭐였다고요? 아니, 그토록 원했던 고기를 잡았는데, 그것도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수많은 고기를 잡았다면 그 물고기들을 이제 날라야 하잖아요.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잡아온 수많은 물고기를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때까지 생명처럼 아껴왔던 배나 그물이나 물고기들마저도 이제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때까지 세상이라고 하는 이름, 지식이라고 하는 이름, 경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었을 때, 그는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 참감람나무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18절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良い木はみな良い実を結び、悪い木は悪い実を結びます。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접붙임을 하려고 해 봤자 결국은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접붙임 되면, 참감람나무로 변화하게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의 능력으로서 과거의 돌감람나무 뿌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이라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어서,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좋은 열매, 극상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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