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회 믿음과 시인
2022년 73 설교 - 로마서 강해 90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10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9節~10節
“9.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10.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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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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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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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0번째 시간으로서 “믿음과 시인” 信仰と告白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은 본문의 구성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9절을 봅니다.

로마서 10장 9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9.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이 본문을 보면 구성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입으로 시인(口で告白)>하는 것이고, 뒤에서는 <마음으로 믿음(心で信じる)>이라는 구성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입으로 시인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쉽게 말해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지요.

이는 대단히 중요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게 돼요.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주인인데 누구를 의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내가 막 기도를 열심히 해요. 내가 이걸 하고자 합니다. 저걸 하고자 합니다. 이걸 해주세요. 저걸 해주세요……아니, 그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바를 주님께 말씀 드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생겨날까요.


예를 들어서 비행기 조종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즘 비행기 특히 여객기 같은 경우는 대부분이 컴퓨터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경로를 입력을 해놓으면 대부분 자동 조종으로 목적지까지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능한 조종사와 미숙한 조종사의 차이가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그럼 그 차이는 어디서 나타날까요. 그것은 바로 위급상황 때 나타납니다.

제가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들은 바에 의하면, 평소에는 자동 조종을 하게 되지만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수동으로 전환을 한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사람 손으로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조종 실력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누가 믿음이 좋고 누가 믿음이 부족한지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러면 언제 차이가 나느냐 하면 바로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입니다.

이걸 해주세요. 저걸 해주세요……라는 기도는 누구나 다 하지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기도를 하지 않나요? 아니요.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있어서의 위급상황이 언제일까요.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바로 기도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내가 이걸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저걸 해달라고 기도를 분명히 했어요. 그런데 기도 응답을 못 받았어요.

이럴 때 믿음이 아직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아니, 내가 기도를 했는데 왜 안 들어 주냐고 불평을 말합니다. 불만을 토합니다. 그러면서 실망을 합니다. 좌절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 당장은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셨지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거야. 더 좋은 것으로 내게 주실 거야 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감사하는 믿음이 바로 큰 믿음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은 우리 기도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이요,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여러분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고 계십니까.

사실 입으로 시인은 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자주 시인을 하고 계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시인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언제 시인을 하십니까.

예, 바로 예배 첫 순서로 드리는 사도신경이 그 시인을 하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기도문은 말 그대로 기도입니다만, 사도신경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몇 년 다니게 되면 사도신경 정도는 외우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의미를 제대로 아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이 그냥 습관적으로 외우기만 해요. 이렇게 그냥 외우기만 하게 되면 입으로 시인은 하는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마음으로 믿는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우리의 소중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사도신경의 이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에 ‘사도’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정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백인지 여부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사도신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해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변해왔느냐 하면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이후로 근현대까지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무엇이 진정한 해석이고 무엇이 잘못된 해석인지가 점점 명확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하는 것, 그 핵심이 정리되어왔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보면서 당연하다고 여기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노력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또한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가 되실 줄 믿습니다.

먼저 첫 줄은 무엇입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我は天地の造り主、全能の父なる神を信ず。

세상 사람들은 우주나 지구 나아가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생물들이 자연의 힘으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세포 생물에서 진화를 하게 되는데, 자손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유전자 복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아데닌은 티민과 결합하고 시토신은 구아닌과 결합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 어쩌다가 실수로 엉뚱한 것끼리 결합을 하는 일이 발생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돌연변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생물들은 유전자의 결합에 있어서, 우연히 일어난 실수의 결과물인 돌연변이로 진화를 거듭해서 결국 사람까지 탄생하게 되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결코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천하만물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나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我はその独り子、我ら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信ず。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장 3절과 빌립보서 2장 6절에서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기록하고,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見えない神のかたち)”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3절에서는 예수님이 없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主は聖霊によりてやどり、おとめマリヤより生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유전자를 이어 받아서 자녀가 태어나게 되는데,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의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도 이 예언은 계속됩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 예언의 성취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넷째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ポンテオ・ピラトのもとに苦しみを受け、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들은 이 부분에서 고민을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에 보면 당시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는 죄가 없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석방을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은 빌라도라기보다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는 다른 한국어 번역이나 외국어 번역을 비교해보면, 직접적으로 빌라도가 예수님께 고난을 주었다기보다는 빌라도 밑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를 로마에서 통치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일정 부분에 대해서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을 어긴다 하더라도 자기들이 처벌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형에 처하는 것은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1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そこで、ピラトは言った。「おまえたちがこの人を引き取り、自分たちの律法にしたがってさばくがよい。」ユダヤ人たちは言った。「私たちはだれも死刑にすることが許されていません。」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원했던 것은 예수님을 가두거나 고통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죽음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로마 총독한테까지 예수님을 끌고 갔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그렇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하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죽음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세상적인 힘에 의해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고 이해해야 정확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입니다.

十字架につけられ、死にて葬られ、陰府にくだり、


예수님이 단순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데에는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キリストは、ご自分が私たちのためにのろわれた者となることで、私たちを律法ののろ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みな、のろ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이 말씀은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한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신 해서 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으로서 저주를 받은 바 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리신 이유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모두 받아 주셨다고 하는 놀라운 은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三日目に死人のうちよりよみがえり、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멸망을 당해야 마땅한데, 죄가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했지요?

그 이유는 바로 ‘용서’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껏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神は主をよみがえらせましたが、その御力によって私たちも、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います。

부활은 예수님 스스로가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이라고 하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하늘에 오르사,”
입니다.

天に昇り、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단순히 부활 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단지 이 땅에서 편하게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을 보시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全能の父なる神の右に座したまえり。かしこより来たりて生ける者と死にたる者とを審きたまわん。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이는 단지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하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은 이제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人の子は、やがて父の栄光を帯びて御使いたちとともに来ます。そしてそのときには、それぞれその行いに応じて報います。

마태복음 24장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마가복음 13장 26절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そのとき人々は、人の子が雲のうちに、偉大な力と栄光とともに来るのを見ます。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이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기록은 성경에 차고 넘칩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오실 때에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정말 누추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에는 큰 권능과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심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을 믿사오며”

我は聖霊を信ず。

요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누구는 성령님을 단순히 무슨 천사와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간단한 문제를 하나 낼까요? 천사는 조물주입니까, 아니면 피조물입니까.

요한계시록 19장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이 천사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자, 천사가 말하기를 자신들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즉, 천사는 우리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가리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부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자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 이와 갈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우리의 믿음을 정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 조심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음에 열거된 것을 모두 ‘믿사옵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무엇을 믿냐 하면 <거룩한 공회(聖なる公同の教会、)>를 믿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이를 굳이 <공회>라고 할 필요가 있냐 하는 것이지요. 이는 천주교에서 온 개념이 좀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넓은 의미의 교회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 즉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인데, 교회는 거룩한가요? 만약에 거룩한 이유를 묻는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아, 그야 예배를 드리는 곳이니까 거룩하죠……가 아니라, 항상 그 질문의 답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また、御子はそのからだである教会のかしらです。御子は初めであり、死者の中から最初に生まれた方です。こうして、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第一の者となられました。

교회의 머리는 목사나 건물주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성경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거룩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건물이나 공간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곳이 주님의 몸 되신 교회요 주님이 머리 되신 거룩한 교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입니다.

聖徒の交わり、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주일학교 다닐 때 사도신경에서 이 부분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아, 우리가 길을 건너거나 할 때에도 지켜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말씀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많이 보이는 것이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는 <믿음>을 열거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쉽게 말해서 성도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을 믿는다? 그게 무슨 신앙고백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는 성령님과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성령님은 저 멀리 군림하고 계신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내주신 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영이라는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요한1서 4장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神が私たちに御霊を与えてくださったことによって、私たちが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私たち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ることが分かります。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두 번째의 교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바로 모임에 있어서의 교제입니다.

간혹 믿음에 있어서 교회는 필요 없다는 식의 교회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성경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어땠습니까.

사도행전 2장 46절~47절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そして、毎日心を一つにして宮に集まり、家々でパンを裂き、喜びと真心をもって食事をともにし、
神を賛美し、民全体から好意を持たれていた。主は毎日、救われる人々を加えて一つにしてくださった。

사람들은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함께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힘썼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ある人たちの習慣に倣って自分たちの集まりをやめたりせず、むしろ励まし合いましょう。その日が近づいていることが分かっているのですから、ますます励もうではありませんか。

교회가 필요 없다, 모일 필요가 없고 그저 혼자서 잘 믿으면 된다? 그와 같은 주장은 성경과 철저하게 배치되는 말에 불과합니다.

물론 알지요. 교회에 모이면 이런 저런 문제들이나 다툼도 생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의 문제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세요. 이미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여러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을 알아가게 되면서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 또한 중요한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자,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입니다.

罪の赦し、

우리의 죄는 누가 사해 주십니까. 유명한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님이 사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하나님이 사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からだのよみがえり、永遠の命を信ず。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해결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사망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그리고 영생인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い。以前のものが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

요한계시록 22장 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もはや夜がない。神である主が彼らを照らされるので、ともしびの光も太陽の光もいらない。彼らは世々限りなく王として治める。

이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몸이 다시 사는 것, 그리고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간략하게 나마 우리의 신앙고백, 사도신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그래도 좀 쉬운 말씀으로 전해드린다고 했는데, 그래도 다소 어렵다고 생각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갑자기 순간적으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올 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빨리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믿음을 굳건히 세우고 싶은데, 너무 말이 길어서 잘 떠오르지 않아요.

그럴 때를 위해서 제가 아주 짧고도 강력한 신앙고백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자, 사도신경은 어떻게 시작하지요? 전능하사……예, 그렇습니다. 거기까지. 그 한마디 말씀으로도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전능하사……

全能の父なる神を信ず。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꽤 유능한 하나님, 꽤 능력 있는 하나님, 꽤 쓸모 있는 하나님,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하나님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무슨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무슨 걱정 근심 불평 불만이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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