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5회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
2022년 4월 10 설교고난주간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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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7節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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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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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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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 主とともにする苦難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한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는 주간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다음 주는 이제 죽음에서 부활하신 부활절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복습하는 의미로 로마서 8장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7節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2절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예수님께서 받은 고난이라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니, 그것은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두 말씀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먼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주님과 함께 한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주님과 함께 받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것인가요?

자, 우선 단순하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예수님 자신의 죄가 사해졌다면, 이는 바로 어떻게 해야 자기 스스로의 죄를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은 아무런 죄도 없으세요. 그렇다면 누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면 누군가의 죄를 해결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누군가의 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二人は言った。「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또다시 아까 그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함께 받아야 할 고난이 없어요? 성경에 보면 있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함께 받아야 하는 고난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를 네 가지 정도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출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 구유에 누우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구유라고 하는 것은 가축들이 물이 물을 마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누일 만한 곳이 없었나 봐요. 그래서 예수님을 구유에 누이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태어나서 구유에 누이셨다고 하니까, 아마도 마구간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신 곳이 마구간이든 아니든 간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안락한 환경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둘째로 가정 형편입니다.

예수님 가정은 부유 했을까요. 아니면 가난 했을까요.

예수님이 태어난 가정, 물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에 아버지 요셉의 피는 섞여 있지 않지만, 그래도 족보상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 모두 다윗의 자손이었지요. 그렇다면 다윗 왕의 자손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가정에서 자라셨을까요?

여기에 대한 단서가 성경에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여인이 자녀를 낳으면 어린양을 바쳐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조항이 있습니다.


레위기 12장 8절을 보십니다.

레위기 12장 8절
“8.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しかし、もし彼女に羊を買う余裕がなければ、二羽の山鳩か、二羽の家鳩のひなを取り、一羽は全焼のささげ物、もう一羽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する。祭司は彼女のために宥めを行い、彼女はきよくなる。」

원래 어린 양을 바치는 것이 원칙인데, 쉽게 말해서 어린양을 바칠 경제적 형편이 못 된다고 한다면, 비둘기를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누가복음 2장 22절~24절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そして、モーセの律法による彼らのきよめの期間が満ちたとき、両親は幼子をエルサレムに連れて行った。
それは、主の律法に「最初に胎を開く男子はみな、主のために聖別された者と呼ばれ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幼子を主に献げるためであった。
また、主の律法に「山鳩一つがい、あるいは家鳩のひな二羽」と言わ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って、いけにえを献げるためであった。

예수님은 장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보란 듯이 흠 없는 어린 양을 바치고 싶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비록 <가정형편이 어려워서>라는 말이 생략되기는 했지만, 어린양이 아니라 비둘기를 바쳤다는 것만으로도 보았을 때, 도저히 어린양을 바칠 여건이 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따라서 예수님이 태어나고 자란 형편은 최소한 경제적으로 본다면 양 한 마리도 바치지 못할 정도로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외모입니다.

예수님은 잘 생겼을까요? 아니면 좀 그저 그러셨을까요. 아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2천년 전에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아, 제가 얼마 전에 꿈속에서 만나보니까…… 라는 말씀을 드리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럼 꿈속이 아니라 어디서 만나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성경에서 만나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가득 찬 구약 이사야서, 그 중에서도 53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彼は主の前に、ひこばえのように生え出た。砂漠の地から出た根のように。彼には見るべき姿も輝きもなく、私たちが慕うような見栄えもない。

옛날에 무슨 예수님을 그려놓은 그림을 보면 머리에 이렇게 후광이 있고 대단히 권위 있고 품격이 있는 모습, 누가 봐도 아, 예수님! 이렇게 알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만, 실제로 이 기록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에 계실 때의 본래 모습을 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만, 적어도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셨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얼굴이 그리 잘 생기지도 않고 키나 몸집도 대단한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만이 아니라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대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표현 아닙니까.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은 더 노골적으로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니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인데, 겉보기에는 무슨 첫눈에 알아볼 만한 그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예, 사람들이 인정을 안 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고 무시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외모에 대해서 더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3장 23절 전반부입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 전반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イエスは、働きを始められたとき、およそ三十歳で、ヨセフの子と考えられていた。


요한복음 8장 56절~57절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ようになることを、大いに喜んでいました。そして、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そこで、ユダヤ人たちはイエスに向かって言った。「あなたはまだ五十歳になっていないのに、アブラハムを見たのか。」

성경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 대략 30세 정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즐거워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나이 50도 못 되었으면서 무슨 아브라함을 봤다고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당시 나이가 서른 정도 셨다고 한다면, 보통 그보다 좀 더 쳐서 “나이 40도 못 되었으면서……”라고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30대 초반의 젊은 사람한테, “나이 50도 못 되었으면서……”라고 말했다는 것은, 어쩌면 예수님의 외모가 실제 나이보다 조금 더 들어 보였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종합적으로 본다면 당시 예수님의 외모는, 한눈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아볼 만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외모로만 본다면 사람들의 관심을 전혀 받을 만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십자가 당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이 트기 전 감람산에서 체포되시고는 새벽부터 재판을 받으시고 아침 아홉시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졸속재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내용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는 피범벅이 되신 채로 골고다 언덕길을 오릅니다. 조금 가다가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집니다. 어떤 여자가 물을 한 그릇 예수님께 드리려고 하자, 이를 본 로마 군인이 걷어차버리고는 예수님을 다시 끌고 갑니다.


이제 예수님이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매고 가게 합니다.

마침내 골고다에 도착한 후 손에 못을 박기 위해 망치를 내리칠 때, 예수님은 그 아픔 때문에 크게 소리를 지르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 아닙니까.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문제를 하나 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내용 중에서 성경에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읽어드릴까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는 피범벅이 되신 채로 골고다 언덕길을 오릅니다. 조금 가다가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집니다. 어떤 여자가 물을 한 그릇 예수님께 드리려고 하자, 이를 본 로마 군인이 걷어차버리고는 예수님을 다시 끌고 갑니다.

이제 예수님이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매고 가게 합니다.

마침내 골고다에 도착한 후 손에 못을 박기 위해 망치를 내리칠 때, 예수님은 그 아픔 때문에 크게 소리를 지르십니다.

어떻습니까. 이 내용 중에서 성경에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채찍에 맞으셨다는 것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다는 것.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매고 가게 한 것.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나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부분

피범벅이 되셨다는 점,
여러 번 쓰러지셨다는 점,
누군가가 예수님께 물을 주려고 하는데 로마 군인이 걷어차버렸다는 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져서 못 일어나게 되셨다는 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 아픔 때문에 소리치셨다는 점.

이와 같은 장면은 영화에서 보셨을 지는 모르지만, 정작 성경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은 그와 같은 부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다소 의외인 부분에 초점을 맞춥니다. 뜻밖인 부분을 대단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마태복음 27장 27절~31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それから、総督の兵士たちはイエスを総督官邸の中に連れて行き、イエスの周りに全部隊を集めた。
そしてイエスが着ていた物を脱がせて、緋色のマントを着せた。
それから彼らは茨で冠を編んでイエスの頭に置き、右手に葦の棒を持たせた。そしてイエスの前にひざまずき、「ユダヤ人の王様、万歳」と言って、からかった。
またイエスに唾をかけ、葦の棒を取り上げて頭をたたいた。
こうして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マント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이와 같은 내용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15장 16절~20절
16.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兵士たちは、イエスを中庭に、すなわち、総督官邸の中に連れて行き、全部隊を呼び集めた。
そして、イエスに紫の衣を着せ、茨の冠を編んでかぶらせ、
それから、「ユダヤ人の王様、万歳」と叫んで敬礼し始めた。
また、葦の棒でイエスの頭をたたき、唾をかけ、ひざまずいて拝んだ。
彼らは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紫の衣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た。それから、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요한복음 19장 2절~3절
“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兵士たちは、茨で冠を編んでイエスの頭にかぶらせ、紫色の衣を着せた。
彼らはイエスに近寄り、「ユダヤ人の王様、万歳」と言って、顔を平手でたたいた。

이 장면은 말하자면 군인들에게 놀림을 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과 군인들한테 놀림을 당한 일. 어느 쪽이 더 고통이 심하겠습니까.

당연히 전자라고 하겠지요. 놀림을 당해 봤자 기분은 안 좋을지 몰라도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오히려 후자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후에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사람들이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을 모욕하는 장면을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た。
「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もしおまえが神の子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そして十字架から降りて来い。」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長老たちと一緒にイエスを嘲って言った。
「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彼はイスラエルの王だ。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うすれば信じよう。
彼は神に拠り頼んでいる。神のお気に入りなら、今、救い出してもらえ。『わたしは神の子だ』と言っているのだから。」
イエスと一緒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強盗たちも、同じようにイエスをののしった。


마가복음 15장 29절~32절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て言った。「おい、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
十字架から降りて来て、自分を救ってみろ。」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と一緒になって、代わる代わるイエスを嘲って言った。「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
キリスト、イスラエルの王に、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れを見たら信じよう。」また、一緒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た者たちもイエスをののしった。


누가복음 23장 35절~37절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民衆は立って眺めていた。議員たちもあざ笑って言った。「あれは他人を救った。もし神のキリストで、選ばれた者なら、自分を救ったらよい。」
兵士たちも近くに来て、酸いぶどう酒を差し出し、
「おまえがユダヤ人の王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と言ってイエスを嘲った。

이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모욕했다는 점 또한 자세히, 사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생애를 네 가지로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출생에 있어서는 대단히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둘째로 가정형편은 녹록치 못했습니다.
셋째로 외모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만하지 못했습니다.
넷째로 십자가 때에도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셨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변변치 못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외모도 배경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서 인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끊임없는 열등감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이러한 점에 대해서 예수님이 열등감을 가지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면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열등감이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과거에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통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와 같은 인물처럼 철학을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절망보다는 어쩌면 열등감, 콤플렉스가 아닐까 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내면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냐 하면, 바로 열등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뻑 하면 뭐라고 합니까. 자존심이 상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네가 나를 무시했다. 그러니까 사과하라고 말합니다.

언론에 보면 그와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저놈이 나를 무시했다는 거예요. 이와 같은 좀 어찌 보면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로 인해서, 심한 경우에는 살인사건까지 발생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그렇습니다. 운전을 하다가도 상대방은 전혀 그런 의도가 없는데,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끼어들어서는 위험 운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금방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자존심이 강해서라고 하지만, 아니에요. 그 반대입니다. 자존심이 약해서입니다.


진정한 의미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웬만해서는 자존심이 안 상해요. 자존심이 약하니까 작은 일에도 금방 자존심이 상했다 뭐다……교회에서는 뭐라고 해요? 예, 시험 들었다고 하지요.

아니, 시험 들은 게 자랑입니까. 만에 하나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 들었다면 물리쳐야지요. 하지만 제가 보면 그건, 영적으로 무슨 시험 든 게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삐진 거죠. 기분 나쁘다 이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해요? 내가 이래봬도 말이야……라고 이어갑니다. 외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말 하지요? 내가 이래봬도 한국에서는 말이야……

생각해보면 참 얼마나 자존심이 약하면 그런 작은 것에 대해서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내가 너무나도 약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무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미리 방어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 만약에 제가 어느 성도님께서 운영하시는 식당에 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가 시킨 음식은 안 나오고, 오히려 저보다도 더 나중에 온 손님들한테 음식들이 나가요.


그러면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성도님이 나를 무시해서 그렇구나……라고 생각을 하겠어요?

테이블을 치고 일어나서 아~니, 지금 저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그러겠어요?

아니요. 안 그럽니다. 왜냐하면 성도님이 저를 무시해서 제가 시킨 음식을 안 가져다 주시는구나……하는 생각을 저는 꿈에도 안 할 거거든요.

조금 더 기다리다가 이상하다 싶으면, 저기…… 제 주문은요…? 그러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아, 죄송해요. 목사님이 시키신 그 음식이 좀 시간이 걸리는 거라서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라고 하시든지, 아니면,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실수로 주문이 안 들어 갔나보네요.! 정말 죄송해요! 금방 해드릴게요!

뭐 그러시지 않겠어요. 그러면 뭐 조금 더 기다리면 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들은 알고 보면 참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경제적인 열등감, 과거에 대한 열등감, 학벌이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 등등 그 종류도 참 다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을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한 성경 말씀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는 어떻게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모든 수치 모든 모욕을 다 이겨내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기분 나쁘십니까. 열 받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7節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우리가 이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다음 구절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한테 모욕을 당해도 기분이 나쁜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 많은 우리들에게 모욕을 당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더구나 그 아픔을 누구 때문에 겪고 계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모욕하고 있는 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모욕을 감당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정말 저 자신이 분통이 터집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셨겠습니까.

정말 인간적인 마음으로라면 “이 자식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뭐 어째?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줄 알아?”

이러고 내려오셨을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구원을 받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3장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そのとき、イエスはこう言われた。「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彼らは、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が分かっていないのです。」

이것이야말로 정말 강한 자존심, 누구도 상하게 할 수 없는 자존심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도 전도를 하면서 때로는 얼마나 참 심한 욕을 듣기도 하고, 무시도 당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저도 아직 좀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성격이 그리 온순한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속으로는, 이 사람아, 내가 당신보다 못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이 사람이 정말 사람을 뭘로 보고 말이야……하면서 수 십 마디, 수 백 마디의 말이 한 순간에 머리에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예수님이 당하신 모욕, 굴욕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못나서 그 때 참으셨을까.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말주변이 없어서 그 때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을까.

“그래. 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겠지요. 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러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습니다.


이제 이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십자가만이 아니라 일평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그 마음을 받아 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우리 이웃을 섬기고 사랑할 때에,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과 영광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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