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회 되돌아보는 우리의 사랑
2022년 3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절~5절
“1~2.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節~5節
“1.私はキリストにあって真実を語り、偽りを言いません。私の良心も、聖霊によって私に対し証ししていますが、
2.私には大きな悲しみがあり、私の心には絶えず痛みがあります。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4.彼らはイスラエル人です。子とされることも、栄光も、契約も、律法の授与も、礼拝も、約束も彼らのものです。
5.父祖たちも彼らのものです。キリストも、肉によれば彼らから出ました。キリストは万物の上にあり、とこしえにほむべき神です。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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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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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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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6번째 시간으로서 “되돌아보는 우리의 사랑” かえりみる私たちの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전체가 5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말씀은 앞의 3절과 뒤 2절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1절~3절
“1~2.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節~3節
“1.私はキリストにあって真実を語り、偽りを言いません。私の良心も、聖霊によって私に対し証ししていますが、
2.私には大きな悲しみがあり、私の心には絶えず痛みがあります。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바울은 지금 큰 근심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근심을 말하기에 앞서, 대단히 이 근심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그냥 잠시 어쩌다가 하는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라, 정말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는 근심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근심이 뭐냐 하면 <나의 형제 곧 나의 골육>이라고 합니다.

그럼 지금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가족이나 자기 집안 사정을 털어놓으려고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4절 첫 부분에 보시면, 그들은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사람(イスラエル人)>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잠시 바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바울은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예,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열두 지파가 있는데, 바울은 무슨 지파였을까요.


빌립보서 3장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그는 유대인 중에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고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는 율법에 규정된 것이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그가 도중에 유대인이 된 것이 아니라, 정통적인 유대인 집안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3절만 다시 볼까요?

로마서 9장 3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바울이 지금 말하기를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다시 말해서 자기와 같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저주를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끊어질지라도 상관 없다……이런 말입니다.

아니, 갑자기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좀 의아스러울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우선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방인이었을까요.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여기에 보면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했지만 지금까지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에 가려고 했냐 하면, 로마에 가서 당신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다른 이방인들과 그랬던 것처럼 거기서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를 근거로 본다면 이 편지의 수신인은 적어도 대부분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다면 애초에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것이지, 왜 멀리 있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게 된 것일까요.

사실 그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봅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6절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シラスとテモテがマケドニアから下って来ると、パウロはみことばを語ることに専念し、イエスがキリストであることをユダヤ人たちに証しした。
しかし、彼らが反抗して口汚くののしったので、パウロは衣のちりを振り払って言った。「あなたがたの血は、あなたがたの頭上に降りかかれ。私には責任がない。今から私は異邦人のところに行く。」

이를 보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 중에서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절반 가까이를 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요, 그리고 설교가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말재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지금 이방인도 아닌 동족에게 말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보통 말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회개의 말씀을 한 번 전했더니 믿는 사람이 3천명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베드로보다 못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고기잡이 출신이었지만 바울은 학벌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언변도 탁월했습니다.

그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 명이 회개를 했다면,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 5천 명 정도는 회개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 일이에요.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회개는 하지 않고, 바울한테 대적하고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8장 6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しかし、彼らが反抗して口汚くののしったので、パウロは衣のちりを振り払って言った。「あなたがたの血は、あなたがたの頭上に降りかかれ。私には責任がない。今から私は異邦人のところに行く。」


그래. 알았다. 너희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안 받아들인다면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한테 있다. 나는 이제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유가 바울이 부족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시면 주님이 바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애초에 이방인에게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런 경우 있잖아요.

내가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에요. 잘못한 것도 없어요. 주님을 열심히 의지하려고 해요.

그런데도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되거나 길이 잘 안 열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에는 무턱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주님께서 내게 다른 길이 있어서, 다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한다면, 이것을 우리는 그냥, 아, 지금의 무슨 선교사 파송 정도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요. 이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고난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님의 인도로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 복음을 전하고 왔더니만, 그 때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이방인한테까지도 전도를 하고 왔다고 칭찬을 했습니까.


사도행전 11장 1절~3절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さて、使徒たちとユダヤにいる兄弟たちは、異邦人たちも神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ことを耳にした。
そこで、ペテロがエルサレムに上って来たとき、割礼を受けている者たちが、彼を非難して、
「あなた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者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彼らと一緒に食事をした」と言った。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함께 밥을 먹는 것조차도 비난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구약에 있어서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면 안 되는 것처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한테 아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만, 이는 그러니까 아주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힘든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이렇게 되니까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한다고 비난을 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예전에 자신들을 핍박했었다고 비난을 하게 되고, 이방인들한테는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을 부정한다고 비난을 하게 되는, 그야말로 대단히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사역은 바울 정도가 아니면 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주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해서, 이와 같은 어려운 사명을 감당하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사람들, 특히나 이 서한의 수신자인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 바울이 이제 유대인들은 포기하고 이방인들만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유대인들은 지옥에 가고 이방인들만 구원을 받게 된다……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하면, 이제 역차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버렸다. 봐라. 바울도 이제 유대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이방인들한테만 전도하지 않느냐……뭐 이런 식으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차별을 받게 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와 똑 같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도 좋다.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모세의 기도와도 비교가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는 죄를 범했을 때 모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절~32절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そこでモーセは主のところに戻って言った。「ああ、この民は大きな罪を犯しました。自分たちのために金の神を造ったのです。
今、もしあなたが彼らの罪を赦してくださるなら──。しかし、もし、かなわないなら、どうかあなたがお書きになった書物から私の名を消し去ってください。」

이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렇게 큰 죄를 지었지만 이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면 나도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는 모세가 자기의 이스라엘 자손들을 얼마나 사랑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도 지금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나도 저주 받기를 원하다는 말은, 내가 유대인을 버리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우리도 “아, 네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가 교회에 안 나간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도 괜찮다……” 뭐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그리 적절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표현은 모세나 바울 정도 되는 경우나 쓸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좀 알아듣기 쉽게, 보다 좀 사랑스러운 표현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다음으로 4절~5절을 봅니다.

로마서 9장 4절~5절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彼らはイスラエル人です。子とされることも、栄光も、契約も、律法の授与も、礼拝も、約束も彼らのものです。
父祖たちも彼らのものです。キリストも、肉によれば彼らから出ました。キリストは万物の上にあり、とこしえにほむべき神です。アーメン。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자신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멀리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 당시 이 때는 아직 신약이 없었고 구약 뿐이었으니까, 구약에 보더라도 유대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고, 성경에는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 받으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자신의 동족을 어찌 버릴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내가 비록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는 있으나, 비록 때로는 자신을 핍박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유대인에 대해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바울은 지금 뜨거운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성경은 누구를 위해서 쓰여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쓰여졌다는 사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읽으라고 쓰여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대목에 있어서, 그냥 단순히, 아, 바울이 그만큼 자기와 같은 유대인을 사랑했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지금 이토록 뜨겁게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뜨겁게 사랑했다는 말씀을 나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십니까. 밖에서는 아주 겸손하고 친절하고 그러는데 집에서는 아주 엄하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 자기와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 대해주면서, 자기와 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까다롭게 굴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 여러분 주변에는 그런 분 안 계신가요?


일본어에는 ‘우치벤케이’라는 흥미로는 말이 있습니다. ‘우치’는 집이나 아니면 안쪽을 나타내는 말이고, 벤케이라고 하면 옛날 일본에서 싸움을 잘했던 사람인데, 밖에 나가면 조용하고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다 하면 갑자기 큰 소리를 치고 자기 멋대로 하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자기 가족한테만 그러느냐 하면, 꼭 가족이 아니라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한테는 자기 고집을 부리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 하지만 자기와 좀 먼 사람한테는 아주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우리말로는 <구들목 장군>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는데, 저는 잘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밖에서 전도하거나 봉사할 때에는 아주 친절하고 헌신적으로 대하면서, 교회 안에 들어왔다 하면, 이것저것을 내세우면서 으시대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챙길 것 같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챙길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잘 챙기고 그러면서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한테는 소홀히 하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서 짓궂게 한다거나 험담을 하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과 형제와 화목하는 것. 이 둘을 비교해볼 때 무엇이 더 중요할까 생각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씀을 지금 식으로 바꾸어 본다면,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아차, 내가 어떤 사람한테 잘못한 것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에이, 지금은 교회 늦을 것 같으니까 일단 예배 드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전화를 하든지 카톡을 하든지 하지 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우선 그 사람과 화해하라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교회 좀 늦어도 괜찮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1부 예배에 못 맞출 것 같으면, 2부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고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일단 이웃과 화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든지 하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와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 34절~40절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はイエスがサドカイ人たちを黙らせたと聞いて、一緒に集まった。
そして彼らのうちの一人、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尋ねた。
「先生、律法の中でどの戒めが一番重要です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아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는 말씀은 <둘째도 첫째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가까운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자기 학생들 돌봐 주느라고 자기 아이를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다는 말씀.

그리고 이는 제가 직접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인데, 그 목사님은 대단히 훌륭한 목사님이시거든요. 하지만 그 분의 자녀분들은 솔직히 좀 대체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성도들도 돌봐야 하고 여기저기 다녀야 할 일이 많았고 해서, 자기 가족을 돌 볼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글쎄요. 저는 그것이 과연 주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기회에 우리의 이웃 사랑을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사람들,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우리 이웃들을 소중히 여기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눈으로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오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오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예, 그렇죠. 나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이는 똑같이 우리 이웃, 내 곁에 있는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어떤 한 사람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그 사람은 누구냐 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 제일 불편한 사람, 제일 싫어하는 사람, 제일 짜증 나는 사람을 한 사람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너무 많이 떠 올리면 괜히 힘드니까, 딱 한 사람만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제 말씀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 같이,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 위에 넘치는 것 같이, 여러분이 생각하신 바로 그 사람 위에도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 사랑은 막연한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공허한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이제부터는 실질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하고 구체적인 사랑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이웃에게 실천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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