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회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2022년 1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27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6節~27節
“26.同じように御霊も、弱い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私たちは、何をどう祈ったらよいか分からないのですが、御霊ご自身が、ことばにならないうめきをもって、とりなしてくださるのです。
27.人間の心を探る方は、御霊の思いが何であるかを知っておられます。なぜなら、御霊は神のみこころにしたがって、聖徒たちのためにとりな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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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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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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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9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私たちを助けて下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하다고 소문난 병원을 찾았습니다. 이제 자기 차례가 되어서 진찰실에 들어가서는 의사선생님한테 심각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릎이 좀 오랫동안 안 좋아요. 그런데 무슨 무슨 약이 좋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러자 의사선생님이 말합니다.

“그럼요, 무릎이 안 좋은 데에 쓰는 약으로는 대단히 좋은 약입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너무나 이상해요. 제가 그 비싼 약을 어렵게 구해서 몇 년 동안 꾸준히 먹고 있는데, 도무지 좋아지지 않아요. 좋아지기는커녕 그 약을 먹기만 하면 소화도 안 되고, 여기저기에 두드러기 같은 게 많이 나고, 몸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이 약이 저랑 안 맞는 건가요?”

이 말을 들은 의사선생님이 뭐라고 했을까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그랬겠지요. 그 약은 먹는 게 아니라 바르는 약이에요.”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잘못 사용을 하게 되면,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발라야 하는 약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면 몸에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글쎄요. 실제로 이런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라서 한 번 제가 그냥 만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27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저 같은 경우에는 이 구절을 보면 생각하는 것은 바로 방언입니다.

방언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같이 이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본인이 하시는 방언을 알아들으시냐는 질문을 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 구절, 특히 26절을 말씀하세요.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이 말씀 아마 한국 교회에 좀 다녀 보신 분들은 드물지 않게 들어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참고로 저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성경에는 방언에 대한 말씀이 나오나요? 예, 나옵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이 바로 오늘 로마서 8장 26절인가요? 아니요. 더 자세히 나온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중에서 방언에 대한 기록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39절 후반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도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바울도 방언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만,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는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6절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린도전서 14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4장 23절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들, 어떤 분들께는 교회에 오래 다니셨다는 분들, 그리고 방언을 하신다는 분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생소하게 느껴지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고린도전서 강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은 우선 간략하게 이와 같은 말씀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6절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는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고 있는데, 방언보다도 예언 하기를 원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앞에서는 39절 후반부만 살펴보았습니다만, 39절 전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성경은 이처럼 반복적으로 방언보다는 예언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는데, 한국 교회를 보면 유독 이 방언 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교회에 다니시다 보면 방언을 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시기도 하셨고, 또한 방언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이 방언에 대해서 본다면 교회에서 성경 말씀대로 설명을 해주는 경우를 많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방언이라고 하면 로마서 8장 26절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정말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대신 말씀해주고 계신다고 설명을 합니다.

앞서 고린도전서에는 방언에 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단순한 숫자상으로 본다면, 고린도전서에는 전체적으로 ‘방언’이라는 단어가 21번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5번이 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방언 하시는 분들이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에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올까요. 예, 단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럼 우리가 방언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로마서를 봐야 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를 봐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고린도전서지요. 특별히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에 있어서의 사용설명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고린도전서에서는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가 교회에 그래도 초등학교 2학년부터 다녔습니다만, 우리가 예언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목사님으로부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고린도전서 14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방언을 하는 분들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적혀 있습니다만, 역시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14장 23절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통 교회에서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을 보면 조용히 기도 한다기 보다는 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보면, 그 때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데, 어느 기독교 서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보면 학교 한 가운데에서 여럿이 둥글게 서서 손을 서로 마주잡고 크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학생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정말 신비스럽구나. 하나님이 계시나보구나. 나도 예수님을 믿어 보아야겠다…….그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주장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방언을 할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면 통성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지요? 솔직히 우리 고백해봅시다. 옆에서 기도하시는 분의 기도 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뭐,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들려오는데 어떡해 해요.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개인적인 내용을 큰 소리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제가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것을 도둑질했습니다. 누구를 미워했습니다. 누구를 속였습니다……저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회개의 기도를 크게 하시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큰 소리로 통성 기도 하실 때 보면 어떻게 기도를 하세요? 대체로 보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게 계세요. 또는 “주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기도를 하시거나, 아니면 크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정말 크게 방언으로 기도를 해도 괜찮으세요? 방언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면서요? 그러면 어떨 때 탄식을 해요? 어떨 때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탄식을 하실까요?

아이구……이 누구누구가 못나서 이런 죄를 지었고, 저런 죄를 지었어요. 마음이 너무나도 아픕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의 처지를 놓고 탄식을 하신다면 이와 같은 기도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이런 기도를 큰 소리로 하실 자신이 있으신가요?

성경에 이와 같이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방언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다음 3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1. 은밀한 내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더라도 상관 없다.
2. 내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한다.

설마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도 상관 없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4장 28절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무슨 내용이 내 입에서 나오는지 모르는데, 은밀한 기도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방언을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람들 앞에서는 잠잠하고 조용히 하나님께 말하라고 이렇게 참 친절하게 방언의 사용설명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다 알고도 사람들 앞에서 크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뭐라고요? 예, 자기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여……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카라바리야라바 싸라바리야라바……”

저 이거 사람들 앞에서 한 시간 두 시간도 할 수 있어요.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첫째 여기에 제 개인정보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둘째,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셋째. 이 방언은 아무도 해석할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방언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고 따라한 거거든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방언을 통역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모든 방언은 통역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자신이 하는 방언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한다면 뭐예요? 예, 그것은 이미 방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에 보면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두 개이기 때문에 앞에 보낸 편지가 고린도전서이고, 두 번째 보낸 편지가 고린도후서인 것이지요. 이 내용으로 보자면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정도 규모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말씀에 보면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방언을 말하면 한 사람이 통역을 하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자면 수 십 명이 한 번에 할 수 있을까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개인적인 은밀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런 식으로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고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컨대 대여섯명, 아무리 많아도 10명까지는 안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게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방언을 하는 사람에 비해 대략 10분의 1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방언을 말하는 열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 정도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통역하는 사람이 극히 소수였다면 당시 이 편지를 받아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했겠어요. “에이, 방언 통역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기도를 하겠어?” 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이렇게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정확히 알고 이에 대해서 지적을 합니다. 그런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한 규모나 상황을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리고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기도도 하고 통역도 하도록 바울이 말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도 방언 기도를 한다는 사람들은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방언 해석을 하는 사람은 그렇다면 적어도 그 10분의 1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지금까지 한 분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성경의 기록처럼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고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지요.

예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데, 자기도 그래서 아무렇게나 말한 적이 있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귀한 고백처럼 제게 와 닿았는지 몰라요.

남들은 방언 기도를 하는데 나만 못한다면 창피할 거잖아요. 그래서 방언처럼 기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분들, 아마도 적지 않게 계시지 않나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자기 믿음이 좋은 척 하는 모습이 예수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믿음생활을 한다면, 나중에 무슨 낯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5절~6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여러분께 사랑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꼭 사람들이 많은 데에서만 해요. 아주 유창한 말로, 문학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큰 소리로 남들이 다 들리게 자기한테 사랑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단둘이 있을 때에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 고백이라고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모습 보다도 단둘이 있을 때 마음이 담긴 몇 마디로 진정한 사랑이 전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기도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창한 말솜씨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진정한 마음을 받고 싶어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 본문인 로마서 8장 26절~27절 말씀을 방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로 한국에서만 그렇습니다. 대체적으로 외국 성경 주석들을 보면 그렇게 해석을 안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본문에 보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탄식만 하나요? 탄식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괴로워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그럼 괴로워할 때만 기도를 한다는 뜻인가요?

성경은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합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렇습니다.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항상 어두침침한 교회에서 무릎 꿇고 분위기 잡으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만이 기도인가요? 아니에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도 주님께 드리는 짧은 기도. 감사의 기도, 기쁨의 기도,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기도입니까.

기도할 것이 없어요? 예전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설교들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너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마음이 너무나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크나큰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정말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다 소용없다,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니고, 내기 십일조 헌금 바친 게 얼마냐.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냐……하는 괴로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고 싶으시다는 주님의 마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들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는, 그럴 때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마음이 괴롭고 지칠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더욱 더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토록 힘을 때라 하더라도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인도해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장면이 성경에 나오나요? 예,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 11절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시고 마귀 사탄의 시험을 당하신 후에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 심부름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연약한 상황에서 힘을 도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힘들고 괴로워하시는 중에 천사가 힘을 더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힘드셨을 때 천사가 도왔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영육간에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이처럼 친히 힘을 더하여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이걸 주소서 저걸 주소서 하고 그저 우리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이걸 하고 싶고 저걸 하고 싶으니까 주님, 이루어 주소서…….만이 아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성경을 읽으라고 말씀을 드리면, 자기는 기도 하는 중에 주님께서 다 말씀 해주시니까 성경을 안 읽어도 된다는 분이 계십니다.

아니, 그러면 성경을 읽은 사람은 믿음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나요. 신학교를 다니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기도가 부족해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나요. 이는 지나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는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도 모르면서 어떻게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되니까, 마치 발라야 하는 약을 먹어버리는 것처럼,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아무리 높은 직분을 받아도, 아무리 유창한 방언을 한다 하더라도,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 올바른 기도, 올바른 행함은 바로 이 성경에 근본을 두었을 때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기도와 진정한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힘들 때,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기쁠 때나, 즐거울 때다, 힘들 때다, 슬플 때나, 어려울 때나,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과 믿음으로 함께 하고, 말씀으로 함께 하고, 그리고 행함으로 함께 할 때,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25회 하나님의 뜻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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