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회 승리의 확률
2022년 1월 9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23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2節~23節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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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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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7번째 시간으로서 “승리의 확률” 勝利の確率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23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2節~23節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먼저 22절에 나오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일부 주석에 의하면 사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는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앞뒤가 안 맞게 됩니다.


오늘 22절과 23절을 보더라도, 그 문장 구도를 보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22절에 나오는 ‘피조물’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단어는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 즉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대조되는 말이 ‘사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다? 이렇게 하면 문장 구도 자체에 모순이 생기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여기에 말하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과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던 것처럼 ‘피조물’은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23절에 보면 우리를 가리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는 우리에 대한 최고의 수식어가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この方は真理の御霊です。世はこの方を見ることも知ることもないの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なたがたは、この方を知っています。この方はあなたがたとともにおられ、また、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성령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전에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후에야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이제는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수기 3장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3장 13절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長子はすべて、わたしのものだからである。エジプトの地でわたしがすべての長子を打った日に、わたしは、人から家畜に至るまで、イスラエルのうちのすべての長子をわたしのものとして聖別した。彼らはわたしのものである。わたしは主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처음 난 것을 대단히 중요하고 거룩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옷을 삽니다. 그 옷을 글쎄요, 10년 20년 입었다고 해요. 이제 너덜너덜해져서 못 입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이제 그걸 뭐, 걸레로 쓰던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도 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새 옷을 사서 그것을 걸레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옷은 자기를 위해서 샀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정성 들여 고른 선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쓰다 남은 열매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했다가 그냥 덤으로 얼떨결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결과, 구원의 결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이는 우리 이웃, 정말 훌륭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어쩌다가 재수 좋게 그 사람 옆에 있어서 덩달아 나까지도 덤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쓰다 남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나 하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나 하나를 위해서 첫 열매로 성령님을 부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중 2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피조물,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탄식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あなたがたには、明日のことは分かりません。あなたがたのいのちとは、どのようなも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しばらくの間現れて、それで消えてしまう霧です。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피곤한 삶을 살아갑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광활한 바다에서 돛대도 없이 나침반도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파도가 몰아치는 대로 오르락 내리락 좌우로 흔들립니다.

이와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고 탄식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반면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은 우리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좀 나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앞에 어떤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우리 입에서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냐 하는 것이지요.

오늘 23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8장 23절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오늘 말씀에 의하면 우리도 역시 탄식을 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御座の中央におられる子羊が彼らを牧し、いのちの水の泉に導かれる。また、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


우리가 장차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씻어 주시겠지만,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도 역시 탄식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우리는 힘들고 괴로울 때 탄식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요? 적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기뻐하면서 살아가야지만 되는 건가요? 어려움을 당할 때 탄식을 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요?

가끔 보면 우리 인생을 달리기, 그것도 마라톤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사도 바울도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푯대를 향하여 달라가는 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푯대 즉 결승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모습은 어때야만 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지면, 예수님을 믿는 삶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넘치기만 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나 슬픔이 닥쳐오게 된다면 이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뭔가 신앙에 있어서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힘들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라톤이 올림픽 같은 대회에서 본다면 달리는 선수들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뉴욕마라톤이나 보스턴마라톤 같은 세계적인 마라톤 대회에서는 그 참가인원수가 몇 만명에 달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승의 영광을 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우승하는 선수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달리고 있을까요? 마라톤에서 달리는 거리는 일반적으로 42킬로가 넘는데, 다른 사람들은 막 힘들어하는 반면 그 우승한 선수는 출발부터 골인을 할 때까지 웃음이 넘치고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함께 달리고 있는 선수들은 모두가 힘들어합니다.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たとえ 死の陰の谷を歩むとしても 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 あなたが 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 それが私の慰めです。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사망의 골짜기,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그 탄식 속에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바로 그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풀려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아요.

당장 가다가 보니까 눈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4장 6절~7절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そこでファラオは戦車を整え、自分でその軍勢を率い、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이스라엘 자손들 뒤에서는 애굽 왕인 바로가 직접 최정예부대와 모든 병거를 이끌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당시 모세와 함께 하고 있던 사람들이 몇 십 명 정도라면 어디 숨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인 남성만 60만명이 넘었습니다. 남녀노소 다 합치면 200만명이나 되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계시고, 힘이 없는 여성들이나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허허벌판 광야예요 어디 숨을 곳도 없습니다.

이렇게 외부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자기들끼리라도 서로 협조를 하고 단결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エジプトであなたに『われわれのことにはかまわないで、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れ』と言ったではないか。実際、この荒野で死ぬよりは、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よかったのだ。」

참 그들은 정말 도움이 안 됩니다. 이렇게 불평불만을 해요.


예전에 어느 외국에서 한국식품점을 운영하는 분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 사는 한국 교민들이 외국 현지 마트에 가면 말이 안 통하니까 불만이 있더라도 말을 못하다가, 한국 마트에 오면 그 울분을 다 토해내는 것처럼 자기들한테 이런저런 것들을 트집잡아서 따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 힘이 든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수 백 년 동안 노예로 살아오면서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던 애굽 사람들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이제 같은 이스라엘 자손인 모세한테는, 협조는커녕 마치 무슨 봇물이라도 터진 것처럼 (堰を切ったように)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이후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경우의 수(場合の数)를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1번 이스라엘 자손들이 항복하고 또다시 애굽으로 끌려가서 노예생활로 돌아간다.

2번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살기가 등등한 애굽 군대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몰살당한다.

3번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 바다로 뛰어들어 빠져 죽는다.

이외에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부정적인 경우의 수를 모두 지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방법,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해주심으로 인해서,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들을 모두 멸망시키시고, 그리고 200만이 넘는 남녀노소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두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단 그냥 동네 마라톤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42킬로를 달리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말이 42킬로이지 성인 평균 걷는 속도가 시속 4킬로라고 한다면, 10시간이 넘게 쉬지 말고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러면 걷는 속도의 두 배로 달린다 하더라도 5시간 이상이에요.

그런데 대회 주최측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완주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대체적으로 본다면 이 거리를 적어도 4시간 이내에 달려야 한다고 합니다.

자, 마라톤 대회가 내일이에요. 기권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참가해야 돼요. 함께 달리는 선수들은 각 나라 국가대표급입나다.

이제 내일 아침 9시 출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결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우승을 하실 수 있겠어요? 사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중학교 육상부 학생들과 겨뤄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마라톤 국가대표급 선수들과 겨뤄서 1등을 해요? 이건 1%도 아니에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불가능입니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결론은 하나, 절대로 우승을 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8장 50절 전반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これを聞いて、イエスは答えら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なさ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을 의지하면. 성령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능히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에서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럴 때 홍해 바다를 떠올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0%,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할 확률은 100%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 주셨는가 하면,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할 확률들을 하나하나 지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군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확률도 지워주시고, 홍해 바다에 빠져서 죽어버리는 확률도 지워주시고, 또다시 애굽으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는 확률도 지워 주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 당할 확률들을 완전히 지워 주셨다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승리한다는 확률, 구원 받는다는 밖에 안 남는 것입니다.

내일 우리가 달려야 할 마라톤 경기의 결말을 우리는 어떻게 예상할 수 있을까요.

1번 시간 초과로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한다.
2번 제일 꼴찌로 결승점을 통과한다.
3번 달리고 있는 도중에 다리에 쥐가 나서 기권한다.
4번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구급차로 실려간다.
5번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실 수 없어서 기권한다.
등등등……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굴려봐도 내가 우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내일 경기에서 질 확률은 100%. 이길 확률은 0%입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 확률은 100%이고, 우리가 우승을 해서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오를 확률은 0%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주셨다고 성경에 기록합니까.

이사야 53장 4절~5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여야 할 고통과 슬픔을 모두 대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아 주시고,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아 주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바로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와 고통의 확률,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100%라고 하는 패배의 확률을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치를 당할 확률을 예수님께서는 몇 프로로 만들어 주셨을까요. 우리가 패배할 가능성인 100%하는 확률을 예수님께서는 몇 프로까지 줄여 주셨을까요.

50%요? 30%요?

만약에 우리가 패배하고 멸망하고 수치를 당할 확률을 예수님이 1%라도 남겨주셨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완전한 십자가요, 예수님의 보혈은 불완전한 보혈이라고 하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수치와 고통과 고난을 100% 대신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패배를 0%로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마지막으로 오늘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본래 우리가 패배할 확률은 100%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패배할 가능성이 0%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몇 프로가 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패배할 모든 가능성은 0%가 되었다면,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100%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선수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좀 평탄한 길을 달리고 있나요? 다른 선수들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우승하는 선수만 깨끗하게 포장된 평탄한 도로를 달리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승하는 선수나 꼴등을 하는 선수나 마찬가지로 똑 같은 도로를, 똑 같은 거리를 달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주님과 함께 가는 우리라 하더라도 우리 인생이 무슨 평탄하기만 하고 어려움이 전혀 없는 삶만 살아간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탄식도 할 때도 있고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해 주시기에,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기에, 그리고 우리가 패배하고 수치를 당할 확률을 0%로 만들어주시고, 이 경기가 끝나는 마지막에는 승리의 확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확률을 100%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승리, 놀라운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試練に耐える人は幸いです。耐え抜いた人は、神を愛する者たちに約束された、いのちの冠を受けるからです。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승리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까지 주님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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