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3회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
2021년 11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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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5節~6節
“5.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6.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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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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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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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9번째 시간으로서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 肉の人と御霊の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시면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에 대한 비교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5節~6節
5.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6.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여기서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 이유는 6절에 나와 있지요.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 속에서 구원을 받으나,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고 만다는 무서운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따르는 사람과 영을 따르는 사람,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과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반면에 영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성경적으로 본다면 ‘육신’이라고 하는 것을 ‘애굽’, 그리고 ‘영’을 ‘가나안’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성경 말씀에 의하면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그 동안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땅을 향해 출발을 합니다.


그 목적지가 어디냐 하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장 7절 전반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現れて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子孫にこの地を与える。」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는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떠났더니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최종목적지가 그들이 도착한 가나안 땅이며, 그 땅을 주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자,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착하도록 지정해 주신 땅에서 살게 된다면, 일이 잘 풀려야 해요? 안 풀려야 해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면,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어나고, 모든 것이 만사형통, 하나부터 열까지 척척 풀려가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주시겠다는 땅은 가나안이었는데, 거기서 살다 보니까 기근이 들었데요.

아니, 내가 평생 살던 터전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왔다면, 하는 일마다 잘 풀려도 모자랄 판에 기근이 들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아브라함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짐작컨대 그의 아내 사라는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니, 여보, 하나님이 큰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니까, 지금까지 잘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온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지금 뭐예요? 이렇게 기근이 들었는데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에요!

아마도 이렇게 다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사라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가 있어요. 성경에 보시면 기근이 그냥 기근도 아니고 기근이 아주 심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가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땅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요. 그것을 의심할까봐 친히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거기가 바로 내가 준 땅이라고 말씀까지 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이게 웬 일이에요. 이제 짐도 좀 풀고 살아볼까 했더니 기근 그것도 아주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생활은 점점 힘들어 가고, 이에 비례해서 사라의 잔소리도 나날이 늘어만 갑니다. 아무리 기다려봐도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으십니다.

자,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겨납니다.

1. 가나안 땅에 머문다.
2. 애굽 땅으로 간다.

당시 애굽이라고 하면 상당한 선진국이었습니다. 경제력으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난 나라, 대단히 풍요운 나라였습니다. 가나안 땅의 경우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고 풀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경우에는 거대한 나일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안정적으로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 중에는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정답을 고를 수 있겠습니다만, 정작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하였더라……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창세기 12장 10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이 기록을 보면 ‘기근’과 ‘애굽’이라는 단어가 한 구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어라? 기근이 들었네? 에라 다 틀렸나보다. 여보, 그냥 애굽으로 갑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망설임 없이 2번을 선택하고 후딱후딱 짐을 싸서 애굽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은 옳았을까요?

1. 가나안 땅에 머문다.
2. 애굽 땅으로 간다.

이 두 가지를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1. 기근이 심한 가나안 땅에 머문다.
2. 기근이 없는 풍요로운 애굽 땅으로 간다.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주저없이 애굽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해석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머문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애굽 땅으로 간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아브라함에게 애굽으로 가라는 말씀을 안 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본다면 현명한 선택이었을 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대단히 어리석은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갔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12장 11절~20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자신의 아내를 빼앗길 뻔한 봉변을 당합니다. 이와 같은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애굽’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적인 선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와 같은 이 외에도 많이 나옵니다.

자, 이제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와서 살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안 들어주세요. 아브라함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은 무엇이었냐 하면, 그것은 땅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아이를 갖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주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そして主は、彼を外に連れ出して言われた。「さあ、天を見上げなさい。星を数えられるなら数えなさい。」さらに言われた。「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

아니, 내가 지금 아들이 하나도 없으니까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니, 참 뜬구름 같은 말씀 아닙니까.

제발 그런 허황된 말씀 마시고 그냥 아들이나 하나 주세요……이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그래도 아브라함은 기다립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났을 때의 나이가 75세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나이는 곧 가나안 땅에서 살기 시작한 나이이기도 합니다.

75세부터 가나안 땅에 살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몇 년을 기다렸냐 하면 자그마치 10년을 기다렸어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고 10년을 기다렸는데 여전히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나이 85입니다.


에이, 옛날 사람들은 800세, 900세까지 살았으니까 젊은 거야……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아의 홍수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홍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의 수명은 점점 짧아져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집니다.

아브라함은 그래도 오래 살아서 창세기 25장 7절에 의하면 175세까지 살았다고는 하나, 이미 노년에 접어든 나이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10년을 기다렸습니다. 10년, 짧습니까? 아니요. 길지요. 참으로 긴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화가 난 사람은 그의 아내 사라였지요. 사라는 말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안 해주시니까, 차라리 자기 여종인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라. 그러면 내 여종이 낳은 아이니까 그 아이를 내 아이로 삼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다그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또다시 선택지가 등장합니다.

1. 기다린다.
2.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


이제 이 선택지를 우리는 제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그냥 기다린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다린다.
2.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

이렇게 해석을 한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라의 말대로 사라의 여종 하갈 사이에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치 아브라함이 애굽을 의지해서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이주한 것처럼,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인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애굽’을 의지하는 것인가요?

성경에는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갈’이 어떤 여인이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 16장 1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アブラムの妻サライは、アブラムに子を産んでいなかった。彼女にはエジプト人の女奴隷がいて、その名をハガルといった。

그렇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려고 했던 사라의 여종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갈이 애굽 여인이었다는 기록은 창세기 16장 1절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16장 3절 전반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創世記 16章3節 後半
彼女の女奴隷であるエジプト人ハガルを連れて来て、夫アブラムに妻として与えた。

창세기 21장 9절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サラは、エジプトの女ハガルがアブラハムに産んだ子が、イサクをからかっているのを見た。

창세기 25장 12절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これは、サラの女奴隷、エジプト人ハガルがアブラハムに産んだ、アブラハムの子イシュマエルの歴史である。


성경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여종 ‘하갈’이라는 이름 앞에 ‘애굽 사람’ ‘애굽인’ ‘애굽 여인’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붙입니다.

이를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갈을 의지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 여성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애굽을 의지한 결과였다는 사실,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 멋대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인 애굽 여인 하갈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고자 했던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멋대로 이주를 했던 것처럼, 그들은 애굽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애굽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한 결과가 어땠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하갈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닙니다. 애굽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한 결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브라함 가정에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인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하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이끌어 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하나요? 아니요. 그들의 입버릇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민수기 11장 5절~6절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玉ねぎ、にんにくも。
だが今や、私たちの喉はからからだ。全く何もなく、ただ、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이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로 그들을 종살이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었더니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를 원망하고, 그러면서 노예로 살았던 애굽을 그리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뭐라고 합니까.

민수기 14장 2절~4절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그들은 끝까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나안 땅 보다도 세상에 순종하는 애굽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서도 못 들어간 채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떠돌고는 흙먼지 날리는 광야 땅에서 하나 둘씩 죽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번에는 조금 선택지를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자,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들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1. 평안해 한다.
2. 불안해 한다.

저는 이 시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 8장, 마가복음은 4장, 누가복음은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마가복음에 있는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 36절~41절입니다.


마가복음 4장 36절~41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そこで弟子たちは群衆を後に残して、イエスを舟に乗せたままお連れした。ほかの舟も一緒に行った。
すると、激しい突風が起こって波が舟の中にまで入り、舟は水でいっぱいになった。
ところがイエスは、船尾で枕をして眠っておられた。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先生。私たちが死んでも、かまわ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イエスは起き上がって風を叱りつけ、湖に「黙れ、静まれ」と言われた。すると風はやみ、すっかり凪にな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ですか。まだ信仰がないのですか。」
彼らは非常に恐れて、互いに言った。「風や湖までが言うことを聞くとは、いったいこの方はどなたなのだろうか。」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심하게 몰아칩니다. 제자들은 지금 난리가 났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급했던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웠더니,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다는 놀라운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하라고 배웠어요? 예, 기도하라고 배웠습니다. 부르짖으라고 배웠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주무시고 계시면 어떡하냐고 흔들어 깨웠던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어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잠을 깨워서 신경질이 난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ですか。まだ信仰がないのですか。」

제자들이 무서워 한 이유,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주무시고 계셨던 것일까요.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폭풍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고 과시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강한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6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6.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우리 삶 속에서도 어려움이 닥칠 때 폭풍우가 몰아칠 때,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왔습니까.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우리가 육신의 생각,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사람의 생각으로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요,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의 생각,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요, 생명과 평안이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애굽을 의지하는 육신의 생각, 세상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영적인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할 때, 진정한 생명과 평안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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