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6회 주님과 연합한 자
2021년 7월 18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5절~7절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5節~7節
“5.私たちがキリストの死と同じようになって、キリストと一つになっているなら、キリストの復活とも同じようになるからです。
6.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私たちの古い人が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のからだが滅ぼされて、私たちがもはや罪の奴隷でなくなるためです。
7.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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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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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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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2번째 시간으로서 “주님과 연합한 자” 主と一つになった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5절~7절, 이렇게 세 구절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우선 6절과 7절을 살펴보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5절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많은 말씀과 함께 놀라운 기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은 때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기도 하셨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기도 하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주님 앞으로 몰려오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기적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서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면 예수님은 직접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실까요?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는,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런 기적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할 수 있다고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예수님 말씀에 나오는 겨자씨는 대단히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 아들인 나밖에 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이런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크나큰 믿음이 있어야지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단히 작은 믿음,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좁쌀만한 믿음만 있다면 뽕나무한테 명해서 바다에 심어지라고 하면 그대로 됐을 것이요, 나무 한 그루 정도가 아니라 이 산더러 명하여 저기로 옮겨지라고 하면 그대로 됐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궁금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시는데,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하는 거죠.

여기에 대한 힌트는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조금 다른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23절
“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イエスは弟子たちに答えられた。「神を信じなさい。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山に向かい、『立ち上がって、海に入れ』と言い、心の中で疑わずに、自分の言ったとおりになると信じる者には、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여기서는 내용은 비슷한데 ‘겨자씨’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들어가 있는 말씀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心の中で疑わずに信じる)’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많은 돈이나 힘든 고행 끝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줄 믿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 이것이 바로 겨자씨만한 믿음이요, 이 믿음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도 능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놀라운 수많은 기적들도 이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있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 이전에도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사람들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아무리 의인이었다 하더라도 사람의 죽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셨던 일 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십자가, 이것이야말로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를 감당해주심으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6절~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6장 6절~7절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私たちの古い人が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のからだが滅ぼされて、私たちがもはや罪の奴隷でなくなるためです。
7.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るのです。

여러분께서는 혹시 텔레비전 같은 데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늘 높이 비행기로 올라가서는 거기서 낙하산을 짊어지고 떨어지면서, 이제 어느 정도 떨어진 다음에는 낙하산을 펼쳐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워낙 위험하다 보니까 초보자 같은 경우에는 전문가와 함께 서로의 몸을 묶어서, 마치 무슨 거북이 등에 올려진 거북이 같은 모양으로 해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높은 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 같으면 천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안 할 일이지만, 외국 같은 데에 보면 꽤 인기가 있는 레저 스포츠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불순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말씀을 예전 시간에 드렸습니다만, 그 뿐만이 아니라, 마치 초보자가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 함께 뛰어내려주는 전문가처럼, 우리의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새사람을 입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5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5.私たちがキリストの死と同じようになって、キリストと一つになっているなら、キリストの復活とも同じようになるからです。

여기서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단어는 바로 ‘연합하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イエスが死んで復活された、と私たちが信じているなら、神はまた同じように、イエスにあって眠った人たちを、イエスとともに連れて来られるはずです。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활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하게 된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지요. 그 부활의 조건이 바로 이 ‘연합하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느냐 하면 그 조건이 앞서 살펴보았던 6절~7절입니다.

로마서 6장 6절~7절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私たちの古い人が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のからだが滅ぼされて、私たちがもはや罪の奴隷でなくなるためです。
7.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るのです。

그러니까 우리의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의 죄인 되었던 몸을 죽이게 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로운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나는 지금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라고 하는 자신감이 있으십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자신 있게 아멘,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글쎄 잘 모르겠네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이를 알기 위한 방법, 즉 내가 진정으로 주님과 연합한 자인지 아닌지, 주님과 연합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 ‘연합하다’라고 하는 단어 그 자체에 주목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 로마서 6장 5절에 나오는 ‘연합하다’라는 번역을 한글 공동번역 성경에는 ‘하나가 되었다’라고 번역하고, 일본 신개역 2017에 보더라도 역시 ‘하나가 되었다(一つになっている)’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복음서나 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날에 관한 내용을 보면 혼인잔치라고 하는 말씀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天の御国は、自分の息子のために、結婚の披露宴を催した王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요한계시록 19장 7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私たちは喜び楽しみ、神をほめたたえよう。子羊の婚礼の時が来て、花嫁は用意ができたのだから。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혼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신랑과 신부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신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4절~15절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それから、ヨハネの弟子たちが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私たちとパリサイ人はたびたび断食をしているのに、なぜあなたの弟子たちは断食をし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花婿に付き添う友人たちは、花婿が一緒にいる間、悲しむ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しかし、彼らから花婿が取り去られる日が来ます。そのときには断食をします。

요한의 제자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았겠습니다만, 신앙을 형식적인 것으로만 판단하고자 했던 이 철없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 드리기를, 믿음이 좋다는 다른 사람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들 제자는 금식을 안 하느냐 하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슬퍼하지 않겠지만 신랑이 빼앗길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분명 머지 않은 시기에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신랑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러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신랑이 예수님이라면 신부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신부는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을 맞이하는 믿음의 성도들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신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과 연합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혼인을 하는 믿음의 성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잘 와 닿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내가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믿음의 성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

그러자 문득 창세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다음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결혼의 정의, 결혼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이가 좋고 깨가 쏟아진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본다면 한 몸이 될 수는 없잖아요. 엄연히 두 사람이고 두 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보통 부부끼리 싸우고 불행하게도 헤어지게 되었다고 하면,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성격차이라고 하지요. 부부 사이는 남들은 절대로 모른다고 하지만, 적어도 성격차이가 그렇게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저희 부부를 보더라도 서로 다른 점이 참 많아요. 오히려 따지고 보면 성격이 서로 정말 똑같다는 부부를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격이 서로 같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더니 왠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해관계의 일치’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곧 아내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이고, 남편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내에게도 손해가 된다면, 그 부부는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내에게 손해가 돼요. 아니면 남편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내에게 이익이 된다면, 이는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무슨 성격의 불일치가 문제가 아니에요. 이처럼 이해관계에 있어서 불일치가 발생하면 이는 그야말로 부부 사이의 심각한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비단 부부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회사를 생각해봅니다.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왜 모인 사람들이에요? 무엇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까.

그렇죠. 돈을 벌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돈을 번다는 게 나쁜 일이 아니에요. 나쁜 일이긴커녕 돈을 번다는 것은 회사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회사가 잘 되려면, 그 회사 직원들의 성격이 모두 같아야 되나요? 아니요. 그건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작은 회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몇 천명 몇 만명이나 되는 회사에서 어떻게 성격이 같은 사람들을 뽑겠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같아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해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장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이 직원들한테도 이익이 되고, 사장님한테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직원들한테도 손해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사장님한테는 이익이 되는데 직원들한테는 손해가 돼요? 아니면 반대로 사장님한테는 손해가 되는데 직원들한테 이익이 돼요? 이런 회사는 오래 못 갑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이해관계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우리에게도 이익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께 손해가 되는 일은 우리에게도 손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게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아요. 아니면 예수님께 손해가 되는 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群衆を弟子たちと一緒に呼び寄せて、彼ら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従って来たければ、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이 말씀은 그렇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도 짊어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예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은 순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또 오해하는 분들이 계세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고생길을 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만약에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라면 누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각 사람마다 순종해야 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고생길, 가시밭길이 아니에요.

물론 어느 한 시기는 고생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그 길은 고생길, 고난의 길이 아니라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순종이라는 것이 바로 이해관계의 일치를 뜻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 길을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예, 가야지요. 그렇다면 그 길이 주님께는 이득이 되고 나에게는 손해가 돼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이유가, 주님한테만 이득이 되고 우리한테는 손해가 되는 길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등골을 빼먹기 위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까.

아니에요. 주님은 그런 악덕기업주, 사이비 교주나 사기꾼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시편 103편 3절~5절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主は 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 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癒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あがな)われる。 主は 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の冠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치료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 보니까 어떤 부부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남편의 낭만은 아내의 불만이래요. 남편이 어떤 자기만의 낭만을 가지고 이런 저런 일을 벌여 놓으면, 그게 아내에게 있어서는 불만이라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다른 방송을 보니까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는 부부가 나왔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질문하기를 원만한 부부 사이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원만한 부부 사이의 비결은 남자의 인내심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항상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 나한테도 기쁘게 느껴지고 하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에는 주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 나에게 손해가 될 것만 같고 불이익이 될 것 같아요. 오히려 주님의 방법이 아니라 사람의 방법대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아요.

이런 게 어떤 상태입니까. 이게 바로 주님과 나 사이에 이해관계의 불일치가 발생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느냐, 아니면 그 십자가를 던져버리느냐 하는 중요한 갈림길인 것입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방법이 아닌 내 방법대로 합니다. 주님 생각보다 내 생각을 중요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방법대로 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우리는 또한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편안한 길이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힘든 길,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 고생과 고난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셨냐는 거죠.

이런 오해는 왜 생기냐 하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이어지고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은 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과 좁은 문을 들어간 다음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넓은 문과 좁은 문으로 이어지는 길, 그러니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까지 가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넓은 문, 멸망에 이르는 문까지 가는 길은 찾지 않아도 보여요. 그래서 누구나가 아무런 생각 없이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좁은 문, 생명으로 이어지는 문까지 이르는 길은 그 길이 좁아서 찾아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 찾아내기가 힘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까지 가는 좁은 길은, 내 힘이 아닌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인도해 주실 때에 여기에 순종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찾지 못하고 넓은 길,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게 되고 만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도 해주실 때, 주님 생각과 내 생각이 항상 같아서, 언제나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가끔은 주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인내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내 생각보다 주님의 생각을 더 우선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인내심이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비결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あなたがたの道は、わたしの道と異なるからだ。──主のことば──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가 하나님 생각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과 연합된 자로서, 우리의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고, 주님과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순종이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생명으로 이르는 문으로 들어가서, 장차 마지막 날에 한 분도 빠짐 없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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