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회 말씀과 즐거움
2021년 5월 23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9절~11절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 9節~11節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1.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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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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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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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4번째 시간으로서 “말씀과 즐거움” みことばと喜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구절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9절과 10절의 구도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9절과 1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9절~10절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여기서 9절과 10절을 각각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구분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9절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그리고 뒷부분은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절도 똑같이 구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


그리고 뒷부분은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이렇게 구분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각 앞부분은 앞부분 끼리, 뒷부분은 뒷부분 끼리 비교해보면 됩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


우선 이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우리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여기서 피를 흘리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짐승을 죽이고 그 피와 함께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律法には来たるべき良きものの影はあっても、その実物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律法は、年ごとに絶えず献げられる同じいけにえ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그리고 11절~14절에서는 이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이와 같이 구약 때 드려졌던 제사는 장차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그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으로 여기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피를 흘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율법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5절
“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だれでも、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るなら、この国に生まれた者であれ寄留者であれ、自分の衣服を洗い、水を浴び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人は夕方まで汚れる。それから彼はきよくなる。

성경에 보면 스스로 죽은 짐승이나 들짐승한테 물려 죽은 것들은 부정하다고 합니다.

어차피 하나님께 바치려면 그 짐승을 죽이고는 태워야 할 텐데, 내가 잡은 짐승이든, 병에 걸리거나 늙어서 죽은 짐승이든, 다른 짐승들한테 물려서 죽은 짐승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피의 의미>가 있습니다.


조금 무서운 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이해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가급적 안 무섭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하나님께 바치려면 그냥 대충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칼로 해체를 해서 피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를 흘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피를 흘린다>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축을 기르고 있는데 아침에 보니까 가축 한 마리가 전날 밤에 병에 걸려서인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럼 그것을 하나님 제단에 바치려고 칼로 해체를 해보아도 이미 굳어서 피는 많이 안 나옵니다. 이는 하물며 다른 맹수들의 공격을 받아서 이미 찢겨진 상태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칼로 해체를 했을 때 피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이는 건강한 제물을 일부러 해쳤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전한 희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온전한 희생>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알아서 죽은 짐승을 하나님께 바쳐도, 나에게는 그 일로 인해서 손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든 안 바치든 어차피 죽은 짐승을 바치는데,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손해가 날 것이 없지요.


하지만 건강하고 흠 없고, 재산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을 굳이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잡는다면, 이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손해가 발생합니다. 이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어디 그런 온전한 제물만 바치겠습니까. 예전에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입니다만, 어느 나라인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지 않아서 아직도 그 나라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지폐가 좀 더러워지거나 하면 은행에서 바꾸어주거든요. 그런데 그 나라는 지폐가 지저분해지면 화폐가치가 없어진대요. 그게 전 잘 이해가 안 됩니다만, 아무튼 그런 나라가 있대요. 그런데 그 나라에 있는 한국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교회 헌금 시간에 보니까 온통 그런 쓸모가 없는 지폐만 넣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 헌금함이 무슨 휴지통이에요? 그 사람들이 바친 지폐는, 물론 현금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이미 화폐로서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그것이 과거에 화폐였다 하더라도 이미 화폐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것을 아무리 많이 바쳐 봤자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손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희생 제물이에요? 아니에요. 이것은 온전한 희생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옛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아니에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2장 22절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盲目のもの、折れたところのあるもの、傷のあるもの、あるいは、うみの出るもの、湿疹のあるもの、かさぶたのあるもの、あなたがたはこれらのものを、主に献げてはならない。また、これらのものを主への食物のささげ物として祭壇の上に献げてはならない。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예, 분명히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습니다. 흠 없는 온전한 제물이 아니라, 흠 투성이인 제물을 바쳐요.

이는 절대로 하나님께 기쁨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온전한 제사를 안 드리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냐 하면, 구약성경 제일 마지막에 있는 말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 1장 7절~8절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祭壇に汚れたパンを献げていながら、『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があなたを汚しましたか』と言う。『主の食卓は蔑まれてもよい』とあなたがたは思っている。
あなたがたは盲目の動物を献げるが、それ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足の萎えたものや病気のものを献げるの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さあ、あなたの総督のところにそれを差し出してみよ。彼はあなたを受け入れるだろうか。あなたに好意を示すだろうか。──万軍の主は言われる──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이 어땠겠습니까. 온전한 제물은 커녕 완전히 흠 투성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을 마치 쓰레기통에 내버리는 식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세요? 야, 그걸 지금 하나님인 나한테 바친다고? 그걸 네 직장 상사한테 갖다줘봐라. 병들고 찢기고 흠 투성이인 고기를 가져다주면 직장 상사가,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고 받겠냐 하는 것이지요.


직장 상사한테도 갖다주지 못할 못쓸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하고 하나님은 엄히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바쳐질 때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온몸의 피를 남김없이 흘려주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한 온전한 희생제물로 삼아 주셨고,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께서 흘려 주신 피라고 하는 사실을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시 한 번 9절과 10절 앞부분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 앞부분은,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9.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

10절 앞부분은,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10.敵であった私たちが、御子の死によって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なら、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が、

이를 합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희생 되어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다……이는 과거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모든 것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9절과 10절의 뒷부분을 비교해봅니다.

9절 뒷부분은,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10절 뒷부분은,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御子のいのち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9절에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즉 하나님이 무섭게 화를 내시는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10절 뒷부분은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아니라 이제 화목하게 된 자로서, 예수님의 살아나심, 즉 부활 생명을 통해서 구원 받을 것이다……

이것은 그렇다면 과거일까요, 현재일까요, 아니면 미래일까요.

둘 모두 구원 받은 것이다……가 아니라,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분명 미래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리를 하자면, 9절과 10절 모두가 이런 구도입니다. 과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희생되어 주셨기 때문에, 미래에 우리는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이제 과거와 미래는 됐어요. 그럼 뭐가 빠졌죠? 예, 현재가 빠졌습니다.

좋아요. 과거에 예수님께서 온전한 희생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장차 우리에게는 영광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믿고 지금은 역시 힘들고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하는 건가요? 고생을 죽어라고 해야지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우리의 현재는 어디에 기록되어 있느냐 하며, 바로 다음 구절 11절입니다.


로마서 5장 11절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11.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과거에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미래에 우리는 틀림없이 구원받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래요? 죽어라고 고생을 하래요? 아닙니다. 즐거워하라고 말씀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즐거워할까요. 힘든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얼굴을 찡그리면서 억지로라도 아이고, 즐거워요. 아이고 즐거워요……그러라는 것입니까.

사실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 신앙에 있어서 점검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에서 보통 믿음이 좋은 분들이, 무슨 문제가 생겼다거나 하면 어디로 갑니까. 예, 기도원에 갑니다.

거기서 기도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예배가 있는 곳에서는 목사님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저도 몇 번 가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나 금식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연 충분한가 하는 것이지요.

자, 질문을 한 번 드리겠습니다.

과거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미래에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1번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알았다. 2번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셨다.

더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1번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알았다. 2번,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알려주셨다.

이는 대단히 명확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말씀과 기도를 본다면 어느 쪽이 중요하겠습니까. 이는 비교가 안 됩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성경말씀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있고, 성경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 가끔 보면 불로불로불로……. 주여! 하고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기도를 드리고 나면, 아~ 온몸 뜨거워졌다고 해요.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당연하죠. 운동했는데.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면서 몸을 흔들었는데 안 뜨거워졌겠어요?

그리고 제 경험상으로 본다면 기도원에 올라갈 때에 성경책은 꼭 가지고는 가는데, 그게 기도원에서는 성경을 깊이 읽을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은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또 보통 기도원에 가면 금식도 하고 그러는데, 며칠 지나면 말이죠, 배도 고파지고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을 읽으려고 해봐도 머리에 안 들어와요.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서 성경을 읽을만한 곳 중에서 제일 좋은 곳이 어디에요? 예, 도서관 같은 곳, 얼마나 좋습니까. 책을 읽을만한 곳 중에서 도서관 만한 곳이 없습니다. 거기는 완전히 책을 읽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변에서, 아아,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까 나 좀 도서관에 갔다올래……도서관에 가서 성경책 좀 읽고 올래……이런 분들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적어도 제 주변에 그런 분들은 없어요.


기도를 열심히 드리면 마음에 평안이 온 것 같습니까. 주님이 느껴지십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냥 한 때의 기분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응답을 받았다, 성령 충만했다고 해서 만족하고 있는다면, 또다시 작은 시험이 닥치면 그런 확신은 모래바람처럼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란이 닥쳐와서 힘들고 어려운데도, 정신 승리로 즐거워요, 즐거워요 하고, 억지로 웃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과거의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 수 있습니다. 미래의 구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현재에 무엇을 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たとえ 死の陰の谷を歩むとしても 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 あなたが 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 それが私の慰めです。

이 말씀을 우리가 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그 많은 인물들이 어려움에 겪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이러실 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그걸 누가 모르나요. 다 알지요.

그럼 다 아니까 성경을 안 읽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사역을 시작해서 백발이 되신 목사님들도, 여전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 마음을 알려고 하는데, 성경 몇 번 읽었다고 이제 다 알아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서 힘써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어떠한 고난이 다가오더라도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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